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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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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전 하늘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일이란 남자와 여자들에게 미래 즉, 불멸의 생명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역자로 행동하는 크나큰 영예를 갖는 대리인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주님의 사업을 함에 있어 

도덕적, 영적으로 아주 탁월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 모두를 도와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신 분이 오른편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이 위대한 사업을 하는 일꾼들의 특권임을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도 같은 특권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업을 경건하고 거룩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날마다 기쁨과 감사의 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경건한 생애로 향상되어 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단의 유혹에 무릎 꿇고 양심을 무디게 하여 성령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승리를 위하여 분투노력할 때 

거룩한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음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 앞에 모시고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도록 한 사람들은 

모두가 성공할 만한 노력을 경주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항상 하는 일에 있어서 더욱더 성장할 것이며, 그 일이 번창함으로써 드러나는 하나님의 축복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진정한 일꾼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사람이 영적 생애에 있어서 크나큰 향상을 이루었다 해도 그는 절대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아도 될 그런 경지에 다다르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우리의 믿음의 증거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모든 문제는 그것들이 비록 진리로 받아들여져 왔더라도 증명을 위해 율법에 비추어져야 한다. 

만일 이 시험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빛이 없는 것이다. (5증언, 573-575)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


우리는 하늘 경주에 있어서 모두 달릴 수 있으며 모두 상을 받을 수 있다.


이 일에 있어서는 불확실하거나 모험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늘의 은혜를 옷 입어야 하며 우리의 눈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하게 한 다음 우리 앞에 모범되시는 분을 언제나 모셔야만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라보아야 할 분은 우리의 거룩하신 주님의 겸비하고 이기심이 없는 생애이다. 


우리의 눈을 상을 얻겠다는 목표에 고정시킨 다음 

그분을 모방하기 위하여 애쓰는 때에는 

우리가 이 경주를 확신을 가지고 달릴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분명코 상을 얻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앞에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끄는 큰 것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의 주장자요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가운데(히 12:1, 2)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인내로 달릴 수 없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길을 지적해 주시며 그의 친 발자국으로 모든 길을 표해 놓으셨다.(2T 258)

죄를 대적하는 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그대는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어야만 한다. 

불신을 이야기하지 말라. 

이와 같이 하는 일에 그대는 구실을 찾을 수 없다. 


그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를 위한 완전한 희생을 이루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결핍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신다. 


불신은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킨다.


우리의 약점과 실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칭찬할만한 일이 못된다.(RH 1904. 3. 10)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마 18:7


비난의 말들은 그 자신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혀를 길들이는 일은 우리 스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 사람에 대해서도 악한 말을 하지 말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외관상으로, 손이나 발처럼 귀중하게 생각되지만 사실은 나쁜 어떤 것들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영원히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결코, 우리의 특이하고 성결되지 못한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 사이에는 이루어져야 할 큰 사업이 있다. 

공중 봉사에 부르심을 받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저들의 입술로 충고의 말을 해줌으로써 저들의 가정과 교회에서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 


악한 소문을 퍼뜨리는 일이 너무도 잦다. 

이런 일은 성령을 근심케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짐을 지고 당신께 나아오도록 명령하신 구주가 계심을 기억하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화평한 마음을 주실 것이며, 또한 곤란의 와중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그분께서는 탄원하신다.…

불평과 비난의 말에 탐닉해 있는 자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이후부터는 저들의 형제 자매들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동료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분께서 지시하신 교훈을 따라야 할 것이다. 


모든 교인들은 그의 매일의 행동에서 모범적이고, 공손하고, 말에 조심하고, 친절하고, 동정적인 태도를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자라는 평가를 모든 사람에게서 받도록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와 교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칠 것이다. -1904년, 원고, 10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베드로가 쓰러지기 직전,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에 대한 구주의 우정은 얼마나 진실되었던가! 


그분의 경고는 얼마나 동정심이 가득했는가! 


그러나 그 경고를 받고 베드로는 분개하였다 


자부심이 강한 베드로는,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신 것들을 결코 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자기 과신이 그를 파멸시켰다 

그를 유혹하도록 사단을 유혹하였으며, 교활한 원수의 술책 아래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가장 필요로 하셨을 때에 그는 원수의 편에 서서 그의 주님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그분을 부인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분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심판정에서, 

그분의 생명을 취하게 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예수님은 

고통당하고 그릇 행하는 그 제자를 생각하시고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셨다. 


그 표정 가운데서 베드로는 구주의 사랑과 동정을 읽었으며, 추억이 조수처럼 그에게 밀려들어왔다. … 


그는 자신이 하지 않겠다고 단언했었던 바로 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다시 한 번 그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한 신성 모독적인 손이 들어 올려지더니 그분의 얼굴을 치는 것을 보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마음이 깨어진 채 심판정을 그는 뛰쳐 나갔다. 

그는 한적하고 어두운 곳으로 나아갔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고 또 개의치도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 시간 전의 장면이 그의 마음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동산에서 고뇌하시던 동안에 

구주께서 그분의 활동에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자들로부터 얼마나 동정과 위로를 얻기 위하여 나아오셨던지를 생각하였다.

예수께서 고뇌 가운데서 그분의 영혼을 토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서 베드로는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죽기를 원하였다. … 


베드로가 홀로 버려졌다면 그는 정복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여 "당신이 항상 나를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던 분, 


구원하기에 능하신 분께서 그를 위하여 간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과신에 빠져, 그의 주님을 배반치 않으리라고 단언했던 베드로가 섰던 동일한 지경에 서 있다. 


그리고 자만심 때문에 그들은 사단의 계책에 손쉽게 먹이가 되고 만다. 



그들의 연약함을 깨닫는 사람들은 자아보다 더 높은 능력을 의뢰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쳐다보는 한, 사단은 그들을 해할 아무런 권세도 없다. …


실패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교훈들이 더러 있다. 


베드로는 쓰러진 후에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불이 금을 정련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시험과 시련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신다. (원고 115, 1902)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요 15:20)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협력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기 위하여 무엇을 행할 것인가. 


그가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릴 것인가.…


그는 진리를 위하여 핍박을 당할 것인가.



비난과 핍박이 많은 영혼들을 하늘로부터 분리시켰으나 한 영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키지는 못하였다. 


아직까지 어떠한 핍박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영혼을 그에게서 내어 쫓지 못하였다.



심령 속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은 흥미 진진(津津)한 사랑인바

대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위대한 사랑, 

곧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는 가운데 나타난바 된 그 위대한 사랑은 비할 데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견딜 수 있다면 

그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서 지배적인 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는 보증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폭풍으로 인하여 시련을 당하는 영혼이 진리를 위하여 비난을 당한다면 그때처럼 구주으로부터 더욱 귀여운 사랑을 받는 때는 없다. 



진리를 위하여 신자가 불의의 법정 앞에 섰을 때에 그리스도는 그의 곁에 서 계신다. 


신자들에게 이르는 모든 비난은 성도의 모양을 가지신 그리스도께 임한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Letter 116, 1896)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29, 30


이 지구 역사의 각 단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업을 전진시키기 위한 대리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


침례 요한의 특별한 사업 곧 주의 길을 예비하는 시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것을 위하여 태어났고 그 일을 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5 주석 11150

그리스도의 공중 봉사 사업이 시작된 후 

요한의 제자들이 모든 사람이 새로운 선생(예수)을 따른다고 불평했을 때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와 자신의 관계를 얼마나 분명하게 이해하였으며 

그가 위하여 길을 예비한 그분을 얼마나 기꺼이 환영하는지를 나타내었다. (8 증언 333)

요한은 개혁자로서 지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요한의 제자들은 저희의 관심을 그에게 집중시키는 위험에 빠져서 

사업의 성공은 요한의 활동여하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업을 맡기 위하여 나오시는 것을 보았을 때 시기하고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와 같은 위험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르사 일정한 사업을 하게 하신다. 

그가 그 사업을 감당할 자격이 있을 때까지 추진시켰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사업을 한층 더 추진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이신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업의 성공은 최초의 일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

주님께서는 때때로 상이한 능력들을 들여오시는바 하나님께서는 이 상이한 기계들을 통하여 가장 잘 성취될 수가 있는 것이다. 

(1 소망 236, 237)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벧전 3:3, 4)


유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의복과 담화는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한지, 무엇이 그들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외모는 마음의 지표이다.


참된 세련은 과시를 하기 위해 몸을 치장하는데서 만족을 찾지 않는다. 



정숙하고 경건한 여성은 옷차림을 정숙하게 할 것이다. 


의복의 단순성은 항상 양식 있는 여성을 가장 유리하고 우월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세련되고 교양 있는 마음은 단순하고 적절한 옷차림을 선택하는 데서 드러날 것이다. 


성화된 심령에는 불필요한 단장을 하려는 생각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 절제와 성경상 위생, 93)


결코 썩지 않고, 이생에서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불멸의 내세에서 흐리지 않은 광택으로 빛날 단장이 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정신의 단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에게 가장 값진 의복을 입히라고 명하셨다. (교회증언 4권, 643)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내적 단장은 값을 헤아릴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외적 단장은 항상 내적 평강과 거룩함과 조화를 이룬다.…


자기 부정과 희생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특정 지을 것이다. 


취향이 바뀌었다는 증거가 여호와의 속량함을 입을 사람들을 위해 닦여진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복에서 엿보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일은 옳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일 먼저 최고의 아름다움, 썩지 않을 것을 사랑하고 찾기를 갈망하신다. 


어떤 외적 단장도 “온유하고 안정한”정신, 이 땅의 모든 거룩한 사람들이 입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계 19:14)의 가치나 사랑스러움과 비교할 수 없다. 


이 옷은 그들을 이 땅에서도 아름답고 사랑 받게 만들 것이며, 내세에서는 만왕의 왕의 궁전에 들어가는 입장 허가 배지가 될 것이다. 


그분의 약속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계 3:4)라는 것이다. (사도행적, 523, 524)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크지요” 시 31:19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자백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 데 있어 하늘이 택하신 수단이다. 


우리는 옛날의 성인들을 통하여 알려진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여야 한다. 



그러나 가장 효력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 속에 있는 하늘의 능력의 역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증인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개성으로 특징지어진 찬송을 당신께 상달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밑받침이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귀중한 고백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는 강력한 능력이 된다. 

(2소망 78, 79)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고백할 그분을 먼저 모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않는 한 참되게 그리스도를 고백할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고백한다거나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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