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그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초대 교회가 가졌던 믿음과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 > 엘렌의 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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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그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초대 교회가 가졌던 믿음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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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의미

성경상 성화를 체험한 사람은 겸손한 정신을 나타낼 것이다. 


성결의 두려운 위엄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세처럼, 무한하신 하나님의 순결하심과 완전하심에 비하여 그들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



선지자 다니엘은 참된 성화의 모본이었다. 


그의 긴 일생은 그의 주님을 위하여 바친 고상한 봉사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하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단 10:11)이었다. 


그러나 이 존경받는 선지자는 

자신의 순결과 성결을 주장하는 대신에 

자신을 죄 많은 이스라엘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였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그는 다시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나이다고 하였다. 


그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교훈을 주셨을 때에 그는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다고 하였다

(단 9:18, 15, 20, 10:8).


471 욥도 폭풍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고 부르짖었다. 


또 이사야는 스랍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고 창화하는 소리를 듣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3, 5)고 크게 외쳤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가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은 후 

자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고후 12:2; 엡 3:8)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사랑을 받은 요한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천사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것같이 되었다(계 1:17 참조).



갈바리 십자가의 그늘 밑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고하거나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으스대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고뇌의 원인이 자기들의 죄였다는 것을 느끼며, 그런 생각이 그들을 스스로 겸비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생애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악과 약점을 가장 분명히 깨닫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의 종교계에서 성화를 두드러지게 논의하고 있지만 


자아를 높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정신과 병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의 종교와는 거리가 먼 상태에 놓여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성화가 순간적인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완전한 성결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믿기만 하면 축복은 네 것이다”고 말한다.



받는 자 편에서는 그 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듯이 생각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부인하고 그들이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는 일이 됨과 동시에 그분의 품성과 뜻의 표현이 되는 원칙에 조화되지 않으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품성과 뜻에 일치하는 성결을 이룰 수 있겠는가?



472 아무런 투쟁도, 극기도, 세속적인 어리석음도 버리는 일을 요구하지 않는 안이한 종교를 믿고자 하는 욕망이 


필경 믿음만으로 이루어진 교리, 곧 통속적인 믿음의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사도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14~24).



거룩한 산 제물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은 이와 같이 사람을 유혹에 빠뜨리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교리를 반대한다.


은혜를 받는 데 필요한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억측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성경의 약속과 법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요구 중 한 가지를 고의적으로 범하면서 거룩해질 수 있다는 신조를 가지고 스스로 속지 말라. 


죄인 줄 알면서 범하게 되면 깨우쳐 주는 성령의 음성을 침묵케 하고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한다. 



“죄는 불법이며”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요일 3:4, 6)다. 



요한은 그의 편지서들을 통하여 사랑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생애를 하면서도 거룩하게 될 수 있노라고 주장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참 모습을 나타내기에 주저하지 아니한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요일 2:4, 5)느니라.



여기에 모든 사람의 신앙 고백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서 성결의 표준으로 정해 주신 유일의 척도로 재어 보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성결하다고 할 수 없다. 



도덕적 율법의 가치를 느끼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여기는 자들,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고 또 그렇게 남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눈에 존중히 여겨질 수 없다. 473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죄가 없노라고 주장하는 그 자체가 성결에서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순결과 성결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품성과 일치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 


또한 예수님의 순결과 고상한 모습, 


그리고 사악하고 지독한 죄의 성질에 대하여 진정한 개념을 깨닫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성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자기와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멀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요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자신이 자기 자신의 눈에 의롭게 보인다.



성경에서 설명한 성화는 전인, 곧 영과 혼과 몸을 다 포함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기도하였다. 


그는 또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편지하였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희생 제물들은 모두 엄밀히 검사되었다.


만일 제물로 드려진 짐승에게서 어떤 결점이 발견되면 그것은 거절당하였다.


왜냐하면 제물은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능력들을 최선껏 양호한 상태로 유지하여야 한다. 



마음과 몸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를 위한 봉사에 부적당하게 만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아닌 것을 드릴 때에 기뻐하실까? 


그리스도께서는 “네 마음을…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로써 하나님께 최선의 봉사를 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촉진시켜 줄 율법과 조화되고자 그들의 모든 역량을 다하여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474 



그들은 정욕이나 식욕에 빠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을 약화시키거나 더럽히지 아니할 것이다.



성화와 일상 생애


베드로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말한다. 



죄악적인 갈망을 만족시킬 때마다 


신체의 기능이 마비되고 


영적·지적 감각력이 죽고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감화는 마음에 빈약한 인상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고 말했다.

  

그는 또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갈 5:22, 23)와 같은 성령의 열매에 “절제”를 부가시켰다.



영감으로 된 이런 말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유행을 따르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또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탐식과 음주와 금지된 쾌락을 통하여 그들의 고상한 인간성을 타락시키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를 견책하는 대신에 


오히려 식욕을 돋우어 주고 물욕과 연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공급할 수 없는 교회의 자금을 보충하기 위하여 너무도 흔히 악을 권장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에 오셔서 종교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고 있는 연회와 부정한 거래들을 보신다면 


그분께서는 일찍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런 자들을 내쫓지 아니하시겠는가?



사도 야고보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성결”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분께서 담배로 더러워진 입술로써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을 부르는 자, 


담배의 악취로 그 입김과 전신이 더러워져 있는 자, 


하늘의 공기를 더럽히고 그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독기를 마시게 하는 자들을 만나신다면,



곧 복음의 순결성과 전연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자들과 만나신다면, 


그들을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견책하지 아니하시겠는가? 



담배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성화의 축복을 받았노라고 주장하며 하늘의 소망을 가졌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계 21:27)한다고 주장한다.



475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 



몸이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된 사람은 해로운 습관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능력은 피로써 값을 지불하고 그를 사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그의 소유물도 주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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