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신 것들을 우리가 사색할 때, 그분의 뜻을 행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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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율법을 범함으로 부과된 형벌을 돌이키십니다.
그때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되며
하늘의 호의를 받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 후에 성취되어야 할 다른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 일은 점진적인 것입니다.
영혼이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어야 합니다.
이 또한 믿음으로 성취됩니다.
믿음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품성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속성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이신 것,
복음이 참되며 구원의 계획을 드러낸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은 구원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적으로 진리를 확신하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죄인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자기 영혼에 적용하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마귀들도 “믿고 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그들에게 의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성경 진리에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자들의 믿음 역시
구원의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이 믿음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진리가 마음을 사로잡지도,
품성을 변화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참된 믿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그 신뢰는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위대한 구원의 희생을 믿을 때 생깁니다.
의롭게 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한 희망과 구원자를 발견합니다.
신뢰가 없어도 믿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에서 비롯한 확신은
믿음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능력을
알게 된 모든 죄인은
계속되는 경험 속에서
이 신뢰를 더욱 크게 드러낼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사도 바울이 설명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은
확신 이상이며
진리에 대한 동의 이상입니다.
이 믿음은 진실하고 간절하고
영혼에 대한 사랑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마음을 정결케 합니다.
영문 <시조>, 1890년 11월 3일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침례 의식과 성만찬 예식은 두 개의 기념비적인 불멸의 대들보이다.
이 두 의식 위에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 넣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당신의 영적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표로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권위 아래
인정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 제도를 만드셨다.
침례는
세상에 대한 가장 엄숙한 포기 선언서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세 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사단 섬기기를 그만 두고
왕족의 한 식구 곧 하늘 왕의 자녀가 되었음을 사람들 앞에 선언한 것이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들에게는 약속이 실현된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 6:17, 18).
그리스도인 생애의 원칙들은
이제 진리에 방금 들어온 사람들에게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공언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구원의 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내가 믿는다.’라는 말과 더불어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품성과 말과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순응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다.
죄 곧 율법을 위반한 행위를 포기할 때마다
그 생애는 율법과 일치하게 되며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주의 깊게 연구를 한 말씀의 빛,
양심의 소리,
영의 투쟁,
이것들은 전 인간,
즉 몸과 영과 혼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한 희생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를 위한
진정한 사랑이 마음속에서 우러나게 한다.
그 사랑은 순종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규례를 지키지 않는 사람 사이에 있는 경계선은 분명해서 눈에 확실하게보이는 법이다. (6증언, 91-93)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 5:19, 20)
과오를 범하여 수치와 어리석음을 느끼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와 과오를 바라보고 거의 절망상태에 빠진다.
우리는 이 영혼들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물줄기를 거슬러 헤엄치려 할 때에는 조류의 힘은 그로 하여금 도로 떠내려가게 한다.
이러한 때에 맏형님의 손이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내밀어진 것처럼
그를 향해 도움의 손이 뻗치게 하라.
그에게 희망의 말을 발하라.…
정신적으로 병든 그대의 형제는
그대 자신이 어떤 형제의 사랑이 필요된 것처럼
그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는 자기처럼 연약한 자를 도와줄 수 있는 도움이 필요되며
그를 동정하고 도와줄 수 있는 자가 필요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되는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를 도와주게 한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위로함을 받은 그 위로를
그에게 나누어 주도록 노력함이 없이
고생을 당하는 하나의 영혼이라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혼의 저열한 성질에 대하여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의 개인적인 교제 때문이다.
방황하는 자에게
그를 붙들어 일으킬 수 있는 전능하신 손에 관하여,
그를 동정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인류애에 관하여 이야기하라.
다만 아무 동정심도 나타내지 못하며
도움을 위한 요청도 듣지 못하는 범과 세력과
어떤 사물들에 관하여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는 따뜻한 손을 붙들 필요가 있으며
마음속으로 온전한 사랑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회복자이시며
그대가 그의 감독 아래서 일하는 때에 큰 결과들을 볼 것이다.(MS 126, 1907)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 4:18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무수한 화제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시간을 빼앗고 의문을 일으키는 문제들이 있으나,
결국은 허무하게 끝난다.
우리의 최고 관심사들은
비교적 하찮은 사물들에 흔하게 바쳐진
면밀한 주의와 정력을 요구한다.
새 이론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영혼에 새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 자체에 중요성이 있는 사실들과
이론들을 알고 있을지라도,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한 거의 가치가 없다.
우리는 영적 생애에 자양분과 자극을 줄 음식물을
우리의 영혼에게 주어야 할 책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신 사물들에 대하여
우리가 심사숙고할 때,
그분의 뜻을 행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여야 할 문제는
“이 시대를 위하여 소중히 간직하고 사랑하며 존중하고 순종해야 할 진리는 무엇인가?”이다.
과학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낙담하였다.
이럴 때, 저들이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의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영혼의 구원을 이루게 할 수 있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랫동안 우리를 강권하여
당신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도록 허락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마음에 특별한 사업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계시하셨다.
이론에 너무 치중함으로
구세주의 모본의 산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이 많다.
그들은 겸손하고 자아를 부인하는 일꾼으로서의 그분을 잊어버렸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에게는 그분의 임재를 생생하게 나타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분의 자아 포기와 희생의 모본을 더욱 밀접하게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했을 때
그가 가졌던 체험이 필요하다. -교회증언 8권, 316~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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