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인 많은 것들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의견 차이를 만들어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가련한 백성들을 혼란하게 되고, 그 모임은 치명적인 상실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것은 그런 모임이 없었던 것보다 못하다.. > 엘렌의 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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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인 많은 것들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의견 차이를 만들어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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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왕하 5:2, 3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아람 왕 벤하닷은 아합의 죽음을 가져온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격파시켰었다. 


그 이후로, 아람인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대적하였고, 

한번은 침입하여 작은 소녀를 사로잡아 갔으며,

소녀는 포로 된 나라에서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노예가 된 이 작은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시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목적을 무의식중에 성취하였다.

소녀는 이교도의 가정에서 섬길 때에

주인에 대한 동정하는 마음이 일어나,

엘리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놀라운 병 고치는 이적을 회상하고, 

여주인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고 말하였다. 


소녀는 하늘의 능력이 엘리사와 함께 하심을 알고,

이 능력으로 나아만이 고침을 받을 수 있음을 믿었다.

포로 소녀의 행동, 

그가 이교도의 가정에서 처신한 방법은 어렸을 때의 가정교육의 능력에 대한 유력한 증거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있어 저희 자녀를 돌보고 교육하도록 위임받은 것보다 더 높은 의무는 없다. 


부모들은 다름 아닌 습관과 품성의 기초를 놓는 일부터 하여야 한다. 


자녀들의 장래는 그들의 모본과 가르침에 의하여 크게 결정된다.

저희 생애가 하나님의 형상을 참으로 반사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이 아이에게 감사와 경의를 일으키게 하는 부모는 복이 있다. 


그들의 친절과 공의와 오래 참음을 통해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오래 참으심을 설명하고, 

아이에게 저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부모는 복이 있다. -선지자와 왕, 244~246.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3:10)


종교 개혁은 신앙의 몇몇 사상에서 두드러진 의견 차와

파벌간에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들을 고집스럽게 고수함으로써 크게 지체되었다. 


우리는 머지않아 면하여 볼 것이지만, 

한 백성으로서 우리가 가르쳐 온 신앙이나 진리에 결정적으로 배치되어 

그대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그대의 의무라고 확고하게 믿고 

또 그렇게 간주하는 것은 실수이며,

마틴 루터 당시처럼 해, 오로지 해를 끼칠 뿐이다. 


갈라서서, 그대의 동료들의 견해를 묻지 않고

그대의 사상들을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느끼면 시작하라.


그러면 그대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나의 남편은 그의 형제들이 취하고 있는 견해들과 다른 몇몇 사상을 갖고 있다.


그의 견해가 아무리 옳다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의 형제들 앞에 그것들을 제시하고

견해의 차이들을 불러일으키도록 부르지 않으셨다는 것이 내게 보여졌다.

공론적인 생각들을 쑤석거려서는 안 된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요점 얻기를 좋아하고

그 한 항에 모든 것을 끌어들이며,

실상은 그것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다르게 이해될 때에도 그 점을 촉구하고, 확대하는 특이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목회자들로 하여금

이 시대를 위한 긴요한 바로 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성격의 것은 무엇이든지 뒷전으로 제쳐놓아야 한다는 것을 두 번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인 많은 것들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의견 차이를 만들어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던 그런 경험을 통과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곧 작은 충돌을 일으킬 것이다. 


가시 돋힌 토론을 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욱 적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하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큰 투쟁을 위해 준비해야 할 때인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이런 분쟁들이 백성들 앞에 이를 때에, 

그들은 어느 한 편의 논증이 옳다고 생각하다가는 

그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다른 논증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련한 백성들을 혼란하게 되고, 

그 모임은 치명적인 상실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것은 그런 모임이 없었던 것보다 못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분쟁과 쟁투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는 이때에

오로지 조화를 드러낼 것들만을 펜과 음성으로 취급하고 출판하기 위해 결정적인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서신37,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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