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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던 아버지를 찾은 뿌듯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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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던 아버지를 찾은 뿌듯한 감동


나의 신앙생활에서 갑자기 예수의 나이가 클로즈업된 때가 있었다.

청년 예수. 아들과 같은 예수를 정말 내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문화에서 나이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믿는 이 청년 예수를 내 스스로가 찾은 예수인가?

그렇지 않다면 학교를 통해 배운 예수이고

교회에서 목사님들에게서 들은 예수이고

성경책에서 공부한 예수이고

친구에게서 소개받은 예수이고

부모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운 예수인가?


예수를 세상 사람들은 사대 성현 중의 한분으로 생각한다.

생각하면 참으로 예수의 영향력은 역사적으로 놀랄만하다.

30세의 청년 예수를 사대 성현 중의 한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적과 같다.

예수는 다른 성현과 비교할 때 그들의 반 토막의 인생 삶을 살지도 못했다.

부처는 29세에 출가하여 45년을 전도하며 살다 입적하고

공자는 30세에 우뚝 섰지만 40이 되어야 불혹의 나이가 되고 

오십이 되어야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다.

소크라테스는 30대 젊은 나이에는 용사로서 전쟁터에 있었을 뿐이다.

어떻게 예수는 3년 반의 공생애의 기록으로 위대한 성현 중의 한분이 되셨는가?

예수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이면 몰라도

동양적인 문화로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다.

주위를 돌아보아도 30대 초반의 청년을 온 삶의 가치를 다하여 섬긴다는 것은

이지적으로 합리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믿고 섬길 수 있을까?


예수에 대한 재조명은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지난 주 나는 예수의 탄생을 보았다.

유대인의 전통에 관심을 가진 보수적인 마태의 의식으로 예수의 탄생을 보았고

복음전도자로 복음에 진보적인 누가의 의식으로 예수의 탄생을 보았다.

같은 시대 같은 사건을 보는 예수제자들의 서로 다른 예수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각기 다른 예수의식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임재를 본다.

공관복음이 기록된 후 또 다른 한 세대가 지난 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다.

그곳에서의 요한의 예수에 대한 의식은 공관복음의 저자들과는 

아주 다른 예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의 예수의식은 두드러지게 관계 의식이다.

그의 모든 기록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식은 아버지의식(Father Conscious)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아버지의식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경배와 믿음의 대상 그 이상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소개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 그 이상을 의미한다.

나는 다음의 성경 절에서 그 관계의식의 진수를 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요한복음8:42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한복음20장17절 


예수의 생애를 재조명하면서 우리의 예수의식이 

믿음의 대상으로의 예수나 하나님 보다는 

관계의 대상으로의 예수의식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초월자이거나 

제우스의 수준이거나, 혹은 super human 일지 모르지만

이 청년 예수는 하나님을 관계의식 속으로 끌어오시고 

우리의 가족의 한 일원인 아버지로 증거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수의 하나님의식인가?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예배하지만 변화되지 않아 고민한다.

아마도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하나님이 우리의 친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된다면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어쩌면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믿음과 예배에 편중된 것 보다

그들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는 생활의 신앙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이 새벽 아래의 예수의 말씀이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잃었던 아버지를 찾은 뿌듯한 감동이 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2011년 2월18일 금요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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