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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에 대한 나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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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4.30 04:21 조회수 9,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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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에 대한 나의 이해

아르헨티나에서 목회하는 최병기 목사님이 칼뱅의 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의 두 번째 칼럼에 달아놓았다. 칼뱅의 5대 강령에 대한 의문이다. 5대 강령은
1. 인간의 전적인 무능 또는 전적 부패 2. 무조건적 선택 3. 제한적 속죄론 4. 성령의 유효하신 부르심 또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5. 성도의 견인 이라고 적어놓았다.
1번은 완전한 타락이라고도 한다. 5번은 구원의 확실성이라고도 한다. 예정했으니 구원의 확실성이란 당연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소위 전예정설의 5대 강령이다. 전예정설이란 아담이 타락할 것도 예정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도 예정되어 있다는 설이다.
신학자들은 칼뱅이 처음부터 이런 예정론을 펼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화란의 돌트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여 5대 강령을 확정하였다. 이 회의를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 1618-1619)라고 한다. 이 회의는 전예정설에 대하여 반대한 알미니안 사상을 잠재우기 위하여 열린 회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칼뱅의 예정론이 예정론을 주장하기 위하여 세운 논리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중에 생겨난 이론이라고 한다.
성경을 기록된 문자만 읽어 가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말씀들이 꽤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의 근원을 깨달으면 오해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전지하시다고 계시한다. 온 우주에 대한 것이든지, 지상에 사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것이든지 모든 것을 시시콜콜히 다 아신다. 시편 139편은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일생이 다 기록되었다고 말하였다(시139:16). 그러니까 인생의 일생이 그 기록대로 될 것이 확실하니 각 개인의 생애가 예정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예지와 예정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그 절대주권으로 전횡하시지 않는다. 이것도 그분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합리적이신 분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예정이다 아니다 하는 논란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생겼다. 죄 왜 세상에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인생이기 때문에 구원이 예정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예정론이 대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예지와 예정의 차이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잠깐 적고 다음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예정은 그 예정된 일에 예정자의 의지가 그렇게 되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지는 그 예지한 일에 예지자의 의자가 전혀 작용하지 않고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지하시지만 예정하지 않으신다. 예지하신대로 되었기 때문에 예정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결코 그것은 예정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아침에 집을 나서는 친구에게 “오늘 아무아무 길로 가지 말게. 10시경에 그 길에 큰 사고가 날 것이네”라고 경고를 했다. 과연 그 시간에 그 길에 그가 말한 그 지점에 큰 사고가 났다. 미리 알고 말한 사람이 그렇게 사고가 나도록 예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가 날 것을 그가 미리 알고 말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집을 떠난 친구가 예언한 친구에게 “자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지”라고 따진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이것으로 하나님의 예지를 비유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지하신다. 그러나 그 예지한 사실을 예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예정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것이 전제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원받도록 예정된 것이다(엡1:4,5).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었다(롬8:29).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이 말씀으로 예수 안에 있는 것과 예수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본명하게 밝히셨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나의 이해로는 구원의 방법은 예정이 되었다(행2:23).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예정한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예정된 방법 안에 들어오면 구원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정된 방법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 안에 들어올 사람과 들어오지 않을 사람을 예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전예정론자들은 그 누구든지 는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제한된 속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데서 나온 논리이다. 이런 주장은 죄를 도덕성의 타락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다. 이 말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씀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속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을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삶을 얻는다. 이 세상에 살았고 살고 있고 앞으로 태어나서 살 사람들 중에 예수님 외에는 아담의 후손 아닌 사람이 결코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아담이 죽을 것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속죄한 것이다. 결코 제한이 없다. 다만 스스로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멸망을 택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칼뱅의 5대 강령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창조와 재창조의 원리에 일치하지 않는다. 또 범죄와 속죄의 도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인지 알고 그 예정인 예수 안에 거하자. 그러면 그는 구원의 예정 안에 있는 것이다. 오직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는 것만이 예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정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그는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인 것이다.
예정론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은 생각날  때 적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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