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손수건 님 월간 <스토리문학> 2008년 10월호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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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씨앗을 열망의 호미로 한 알 한 알 심고, 고뇌의 밑거름과 희망의 웃거름을 주며 가꾸다 보니 어느덧 결실의 계절 10월입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나르듯 치열하게 시의 언어를 물어 나르던 하얀 손수건 님이 ‘바둑돌들이 가르쳐준 세상’ 외 2편으로 월간 <스토리문학> 10월호 신인상에 당선되셨습니다.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시인의 길로 들어서신 하얀 손수건 님을 환영합니다.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둑돌들이 가르쳐준 세상 이어진 길 "방심 말고" 끊어진 길 "절망 말고" 굴뚝연기같이 머리 풀고 흩어져 있는 대관령 안개 밭이라도 길은, 묻고 발견한 손끝에선 장롱 속 잠자는 비상금같이 번득이는 깨달음, 길이 없다 길이 없다 속절없이 세상 탓에 눈 흘기면 잔주름만 찌푸리는 미간 사이로 길은 없다가도 문득 솟아나고 보이지 않다가도 보이는, 다 죽어가다가도 타들어간 화왕산 억새밭에 숨겨진 불씨같이 모진 생의 끈, 그러니 일어나야지 시간표 같은 눈금 위에 검은 돌 횐 돌 한 점 한 점 떨어뜨려 알알이 박힌 희망의 싹 틔워봐야지 도장리의 아침 풍경 전깃줄에 내려앉은 햇살을 한 올 한 올 쪼아 먹는 참새가 밤새 안녕을 모로스 부호로 짹 짹. 짹, 짹짹 확인하면 납작 엎드린 누렁이 큰기침으로 일어나 컹 컹. 컹컹, 컹컹 팔백 광년을 밤새 날아온 빛살에 눈뜨면 벼 잎 대롱마다 초롱초롱 물빛방울 천 개의 영혼 휘어잡고 고뇌하는 아침 자전거 위의 아저씨 빨간 고추밭 사이로 지나온 외길 등 굽은 세월이 소문 없이 스르륵 스르륵 바람결에 사라진다 빗속의 운전 날아봐 날 수 있을 거야 속도를 올리는 액셀러레이터 심장이 두근두근 달아오른다 명령에 죽고 사는 둥근 핸들 비틀비틀 흔들림에, 떠는 "대부도 제부도" 선간판 애써 외면하다 물기로 흘러 가물가물 사라진다 하늘과 땅을 날 잡아 헹구는 저 수 많은 빗방울 청소부 딱딱하게 죽은 땅을 투명한 액체로 핥으며, 툭툭 가슴으로 파고드는 철없는 눈물 자꾸만 닦아내는 와이퍼 와이프 자매들 역시 날 수가 없다고, 앞을 봐 정해진 금 안으로만 달리는 꿈을 잃은 딱정벌레들 비에 젖는 활주로 기어가고 있다 <당선소감> 나도 언젠가 당선 소감을 써 봤으면 하는 부러운 꿈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다. 시의 무한한 세계를 엿볼수록 나의 존재는 가볍기만 하다. 그럼에도, 내 은밀한 마음 한구석엔 언젠가 꿈꾸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을 잊고 살았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그러다가 나의 글 스승 채빈 윤연옥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버려진 묵은 땅에 열정의 씨를 뿌려 시와 씨름하면서 글귀의 눈이 조금씩 뜨이는 묘미에 빠져들고 있다. 시를 쓰면서 행복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는 세상을 여는 창문과 같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마음의 창을 여는 따뜻한 시로 보답하고 싶다. 내 안과 밖 말끔히 닦아서. 부족한 점이 넘침에도 앞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스토리문학에 깊이 감사드린다. 동고동락한 시 긷는 마을 벗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다. 채빈 선생님의 손 잡아 주심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의 정신적 모태인 어머니,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끝맺지 못해 늘 가슴에 담고 쓸쓸해하시는 어머니께도 이 기쁨을 전해 드린다. <심사평> 이어진 길 방심 말고, 끊어진 길 절망 말고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둔다. 바둑판에는 인생의 오묘함과 희로애락이 모두 들어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말 뿐이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 깊이를 혜량할 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은데 이 시인은 “이어진 길 ‘방심 말고’/끊어진 길 ‘절망 말고’”라는 큰 교훈을 발견한다. 바둑판은 호남평야도 되었다가 묵정밭도 되었다가 안개에 싸인 대관령처럼 오리무중의 첩첩산중이 되기도 하며 장롱 속에 숨겨두었던 비상금이 떠오르듯 번득이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람의 인생은 바둑판 속에 모두 들어있다. 그래서 선인들이 그 인생의 숙제를 풀기 위하여 요지경이라도 되는 양, 경전이라도 되는 양 세월을 보내며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바둑판은 인생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으며 상대가 어른이거나 아이거나,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지거나 이기거나 겸손하며 배려해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데, 이러한 이치는 결국 시의 이론과 맞물려 있으며 그 이치를 터득한 이재복 시인은 시인이란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모두 빼어나다. 국문학을 전공하고도 제 길로 들어 서는데 오래 걸렸다는 시인에게 결코 그 세월은 헛되지 않았으며 문학의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글 좋은 작가를 만나는 것은 심사위원들의 큰 기쁨이다. (심사위원: 이수화 지성찬 최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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