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버이날에 / 에스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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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에
에스더 유
예기치 않았던 전화 한통을 받고 서둘러 비행기 예약을 하고 한국에 도착했을 땐 어머님은 이미 이 세상을 쓸쓸히 홀로 떠나버리신 후 이었습니다. 갑자기 가슴에 큰 구멍이 난 것처럼 통증이 오고 현기증이 나면서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고 하늘마저 캄캄하게 느껴졌습니다.
지난 이년 반전 아버님을 떠나보낼 때 보다 몇 배 가슴이 더 쓰리였습니다. 그때는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어머님이 생존해 계셨기에 두 분 중에 한 분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다림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 이였습니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6월의 하늘아래 인동꽃은 피어 만발하지만 한번 가신 부모님은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멀고 먼 길을 떠나가셨습니다. 이렇게 다시 인동꽃이 피는 즈음이 되면 떠나가신 부모님이 한없이 보고 싶고 말할 수 없이 그리워 가슴 절이는 안타까움으로 잔잔한 슬픔이 몰려옵니다.
저희 아버님과 어머님은 7남매를 두셨습니다. 아들 다섯과 딸 둘, 다복하고 금슬 좋은 부부였지요. 아버님은 자상하시고 인정과 동정심이 많으셨고 어머님은 그런 남편에게 순종하시는 현모양처였습니다.
추운 겨울 7남매 가슴을 녹여주던 따뜻한 대야 물과 따끈한 도시락을 매일 학교에 배달해 주시던 아버님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분이였습니다. 하복과 동복 학교 유니폼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세탁소에 가서 말끔히 다려서 저의 방에 걸어주시고 더러워진 운동화를 손수 물에 닦으시고 가루치약을 보얗게 발라 주셨습니다. 그리고 7남매 아이들의 생일을 꼭 기억하시고 축하해 주셨으며 중공업 회사를 경영하실 땐 출장가시면 아이들의 선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딸은 출가하면 시집가문대로 살아야 하기에 아들보다 딸을 더 측은하게 여기시고 조석 겸상을 함께 하시며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가정의 대소사를 말씀해주셨던 분입니다. 5살 어린 딸에게 천자문을 벽에다 써 놓고 가르치시던 엄격하신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딸의 결혼을 반대하셨기에 미국으로 이민 온 후에 부녀의 막혀진 담을 헐기 위하여 먼저 마음 문을 여시고 눈물로 얼룩진 장문의 편지를 쓰셔서 9년 동안 얼어붙은 저의 마음을 잔잔한 감동의 필치로 녹여주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나간 그 일을 잊으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그 속 깊은 사연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품이 대쪽처럼 강직하신 아버님이셨지만 조부모님들께 효도하셨고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정의감과 신의를 목숨처럼 강인하게 지키시려하셨고. 그러면서도 동정심이 많으셔서 가난한분들 도우시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가끔씩 볼 수 있는 일들은 돈이나 쌀이나 간장 된장이 떨어진 분들이 오셔서 사정이야기를 하면 넉넉히 나누어 드리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버님의 뜻을 어머님은 말없이 따르셨으며 언제나 지나가는 길손들과 이웃노인들을 대접하시기를 즐기셨으며 가난한 시절 쇠고기 국을 넉넉히 끊이시고 꼭 노인 분들 계시는 집집마다 나누어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시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셔서 효자 효부로 칭송이 자자하셨던 분이였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 심성은 물처럼 맑았고 학인 듯 고고한 자태와 목련처럼 우아한 기품을 지니셨기에 가슴을 열어 넉넉하게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비록 사업 실패 후에는 초야의 범부로 묻혀서 사셨지만 부모님은 가문의 자랑입니다. 우리 7남매의 가슴속에 영원히 빛나고 있는 보석이며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아있으십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현대식 드라마처럼 7남매에게 아버님의 마음과 뜻과 소원하시는 일들을 자식들에게 유언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 저희 7남매에게 남기신 가훈과 유언에 따라 우리는 국가와 사회와 이웃과 가정에서 덕을 끼치며 살아갈 것을 다짐했고 또 최선껏 노력하고 있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기 비로전의 마지막 날은 우리 가족들 차례차례…우리 부부와 손자들과 손부들과 증손자녀들에게 말씀하시며 칭찬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혹시나 결혼생활을 유지 하지 못할까봐 염려하셨지만 저의 결혼 선택을 존중하셨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들과 며느리들에게 “자랑스러운 딸 가정”이라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임종 시, 아버님과 어머님께 각각 누가 제일보고 싶으시냐는 맏며느리의 질문에 두 분 다 멀리가 있는 맏딸이 가장 보고 싶다고 하셨다는 말씀에 가슴이 저밉니다. 위로 딸 셋을 잃어버리고 겨우 붙잡은 장녀였기에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부모님의 안타까운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내 가슴에는 쓰리는 아픔이 문득문득 솟아오르곤 합니다. 생전의 부모님과 나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았기로 그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한 불효녀. 어버이날에 인동꽃처럼 애절한 그리움을 안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그날까지 깊은 잠 주무시며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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