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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왼쪽 자리 / 고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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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림문학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9.18 06:27 조회수 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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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자리 / 고대석

  어떤 모임이나 집회에 가서 앉을 자리를 잡아야 할 때 나는 먼저 왼쪽 편 자리를 찾아 간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쩌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른쪽 자리에 앉게 되면 좌불안석이다. 그리고 왼쪽만 자꾸 바라 보게 된다. 일종의 정신 장애일까 두렵다. 조선 시대의 관직 중에 좌의정과 우의정이 있었는데 서열상 좌의정이 상석이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퇴계 이 황 선생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기 위해 안동 땅에 ‘호계 서원’을 세우고 그 곳에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그런데 그 위패의 좌측에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를 두고 지난 400년 동안 두 가문이 자존심 대결을 보여왔다.  얼마 전 좌 서애 우 학봉’으로 결정을 보았다. 수 제자였던 풍산 유씨 가문의 서애 유 성룡의 위패를 좌측에, 또 다른 수 제자였던 의성 김씨 가문의 학봉 김 성일의 위패를 우측에 모시기로 확정하였다. 강직한 선비의 신념과 가문의 영광을 지켜내야 할 임무가 내게는 없다. 그런데도 왼쪽 자리인 좌의정 자리 쪽만 바라 보는 것은 유학자의 유전자를 이어 받아 자리의 좌우를 염두에 두는지도 모르겠다. 영어를 상용하며 우주를 넘나 들고 글로벌 경제를 사는 지금 세상에서는 정신병 검진을 받아야 할 상태일 것이다. 자리에 앉을 때도 나는 아내의 왼쪽, 아내는 나의 오른쪽에 앉아야 편하다. 길을 걸을 때도 그렇다. 좌우가 바뀌면 우리는 자연스럽지 못해 서로 바꾸어 제 자리로 가서 걷는다. 잠 자리에 들 때도 이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바꾸어진 잠 자리는 상상할 수도 없다. 자동차를 타고 아내와 동행일 때도 왼쪽 운전석 자리는 내 자리이다. 사십여 년 동안 지켜 온 내 자리이다. 시내에서도 그렇지만 조금만 먼 거리를 갈라치면 절대적으로 그 자리는 내 자리이다. 나와 아내의 생명을 책임 져야 하는 중요한 자리이며 아내를 향한 나의 절대 권위의 상징이기도 한,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나의 왼쪽 운전석 자리이다.

  매년 3월 말이면 우리 부부는 결혼 기념일을 맞는다. 이 때가 되면 모든 형편과 사정을 접어 놓고 우린 여행을 떠나곤 했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년 초에 나의 왼쪽 눈에 사고가 생겨 수술을 받게 되고 회복이 빨리 오지 못해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왼쪽 자리에 집념하여 살았었는데 공교롭게도 왼쪽 눈의 고장으로 그 중요한 왼쪽 자리를 지킬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것 저것 보아야 할 일들은 아내가 다 다니며 처리해 주었다. 자동차로 같이 갈 일이 생기면 나는 오른쪽 자리로 밀려나고 그리도 고집스럽게 지켜 온 왼쪽 자리 운전석은 아내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그리고는 내 입만 가지고 그 자리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했다. 너무 빨리 가고 있다느니, 차선을 지켜야 한다느니, 깜빡이 등을 켜고 차선을 바꾸라느니. 실제로는 아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 도움도 안 되는 말을 가지고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도 운전을 할 수 있었을 때는 그러지 않았었는데 실격사유를 가진 지금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 자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가. 분명히 아내에게는   잔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참 용하게도 아무 반응도 없이 조용히 운전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제껏 안전하게 운전해 주던 남편이 어려움을 당하며 운전도 못하게 된 형편이 측은해서, 아니면 입이라도 살아서 옆에 있어다오 하는 마음에서였는지 모른다.

 그러다 침묵으로 차창 밖을 내어다 보며 이런 생각에 잠겨 보았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든 자리라는 것도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누구든 젊은 날 동안 노력 하고 투쟁하여 얻어 낸 자신의 자리, 자신 만이 가질 수 있는 자리, 아니 자신만이 가져야 된다고 확신했던 자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걸 맞는 사회적 위치와 특권을 포기해야 하는 연령이나 형편이 되었을 때는 계승하는 후계자들에게 권위 행사적 훈계를 주기 보다는 침묵으로 아름답게 바라 보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 경쟁자가 앉게 되었을 때 그를 모함하고 흔들어 떨어 내리려 하지 말고 자리를 차지한 자는 온갖 방법과 계략을 동원하여 그 자리를 지켜 내려고만 억지를 부리지도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침묵으로 회고하는 지난 날들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나 미련과 아쉬움 때문에 하는 충고의 따끔한 말 한 마디는 상처만 깊게 해 상흔으로 남게 될 것이다. 세상을 이끌어 온 추억들을 아름답게 남겨 두어야 내 인생 길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세상을 이어 받는 젊은 후계자들을 대견스럽게 바라 보고 침묵으로 밀어 주어야 앞에 오는 세상이 더 아름답게 가꾸어져 가게 될 것이다.

 결혼 기념일을 그냥 지나치기를 못내 아쉬워하며 아내는 가까운 곳으로 외출이라도 하자 했다. 아내가 운전을 하고 두 시간이 채 못 되는 Lancaster City에 있는 California Poppy Reserve Park에 꽃 구경을 가기로 했다. 나의 왼쪽 운전석 자리는 아내에게 넘겨 주고 나는 오른쪽 자리에 손님처럼 앉아 가게 되었다. 가는 길 안내는 말로 하고 잘 볼 수 있는 오른 쪽 눈으로는 마지막 나들이를 나온 사형수의 심정으로 주위 풍경을 휘 둘러 보곤 했다. 목적지 산 허리와 들판에는 노란 Gold field꽃들이 바다를 이루고 빨간 Poppy꽃들은 많은 섬들을 이루고 있었다. 이정표처럼 Fiddler’s Neck꽃들이 곳곳에 일어서 있고 불어 오는 봄바람에 꽃 물결은 잔잔한 파도를 이루며 출렁이고 있었다. 꽃 들판 사이 길을 따라 나는 왼쪽에 아내는 오른쪽에 나란히 걸었다 오랜 시간 꽃 들판을 걷는 동안 내 왼쪽자리를 되찾을 수 있어 행복했다.  사진도 많이 찍어 두었다. 왼쪽 눈이 아직 불편하고 왼쪽 운전석 자리를 지키지 못 하지만 참 오기를 잘 했다고 고백했다.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육신의 질병이나 마음의 고통까지도 압도하는 여유와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나 보다. 돌아 오는 길에도 나는 오른 쪽 손님 석 자리에 앉아서 준비해 왔던 음식과 과일을 나누어 먹으며 행복에 잠겼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지켜 오던 나의 왼쪽 자리 운전석을 지키지 못하고 넘겨 주었는데도 밉지를 않다. 빼앗겼다는 생각도 없다. 이제는 그 자리가 나만의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을 능력과 자격이 있는 사람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는 당연히 그 자리는 능력자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자리가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승계가 이루어 진다면 살아 볼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내 자리를 고집하지도 말고 남의 자리를 탐하지도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꽃 들판 같을 것이다. 꽃 들판에 살고 있는 여러 종류의 꽃들은 서로 다투지도 않고 전쟁 선포를 하지도 않으면서 하늘이 허락하는 모든 혜택을 받아 누리며 함께 이 아름다운 꽃 들판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잘 된 사진을 골라 큰 캔바스에 옮겨 담아 벽에 걸었더니 훌륭한 작품사진이 되었다. 사진 속에 넓게 펼쳐진 꽃 들판을 바라 보니 미소가 피어 오르고 마음이 행복해진다. 한 달 후면 내 왼쪽 눈도 다시 잘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나의 왼쪽자리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하고 갈 수가 있을 것이다. 나의 자리를 되 찾는다고 아내가 항의 하거나 싫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리의 주인이 바뀌어지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과 잡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왼쪽자리에 앉는 때부터 나는 그 자리가 주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소중한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며 직장에도 성의껏 나가 생활의 안정을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먼 거리를 갈 때는 내가 그 왼쪽자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을 당해 갈 때나, 참담한 심정이나 행복한 마음으로 갈 때나 간에 나는 꼭 그 왼쪽자리 운전석을 잘 지켜 내야 한다. 다시는 내 눈이나 몸이 상하게 되는 일을 겪지 말아야 한다. 내 행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른쪽에 앉는 아내를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사진 속에 아내는 꽃 들판의 왼쪽 편에 앉아 있다. 이 사진의 왼쪽자리는 영원히 아내의 자리가 되었고 꽃 들판은 그 녀의 소유처럼 되었다. 왼쪽 자리를 잃었는데도 그 녀가 밉지 않다. 빼앗아 오고 싶은 마음은 더 더욱 없다. 마음 속은 아름다운 꽃 들판처럼이다.

'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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