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십분간의 동행 / 하정아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십분간의 동행 / 하정아
76세 된 노인 한분을 만났다. 병동과 다른 건물에 있는 인사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바쁘게 걷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병원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라 반갑다 했다. 혈액체취를 해야 하는데 장소를 찾지 못한단다.
내가 일하는 병원은 닥터스 하스피탈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많은 닥터들의 진료실들이 병원의 부속 건물로 딸려있다. 그는 닥터 이름을 모른다 했다. 무슨 서류라도 있느냐 물으니 종이 한 장을 꺼내주었다. 특정 의사의 진료실이 아니라 병원 검사실에 가야할 분이었다. 따라오라고 말씀드린 후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간호사의 걸음이 얼마나 빠른가. 그는 나를 놓칠세라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직업의식이 어디 갈까. 나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늦추었다. 그가 넘어지면 큰 낭패다. 나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의료인의 기본 소양에 대한 카운슬링을 시작으로 증인이 되는 일까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그가 인격적인 존재임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가 넘어지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까, 하는 염려대신 나는 오직 나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기적인 생각이 미웠다.
나는 아예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그때 마음 한구석이 쿵,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에베레스트 산동네의 셰르파가 된 느낌이었다. 일정 시간 걷고 나면 등반가들의 독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멈춰 서서 하염없이 뒤쳐진 영혼을 기다린다는 사람들.
지팡이를 짚고 위태롭게 걷는 그가 내 영혼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다. 늙고 병들고 남루한 영혼. 힘들게 몰아쉬고 있는 그의 한숨이 나를 따라잡느라 지쳐버린 내 영혼의 흐느낌처럼 느껴졌다. 영혼에 대한 배려 없이 바쁘게 전진만 하면서 살아온 나날들. 알맹이는 없고 헛 껍데기로만 살아온 나날들. 허전하고 쓸쓸한 일상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도착했다. 마침내 내 영혼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보폭에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언제 이렇게 느리게 걸어보았을까. 세상에 태어나 걸음을 배운 이후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벅찬 마음 때문에 울상이 되었다. 눈두덩이 따끔거려서 두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노인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는 관절염 때문에 빨리 걷지 못한다며 연신 미안하다 했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낡을 대로 낡아서 구멍이 난 양말 사이로 발가락이 보였다. 앞이 막힌 신은 꿸 수조차 없을 만큼 양쪽 발이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통증이 심하겠다 했더니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병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했다. 담담한 표현이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가 비틀거리는 것 같아 팔을 부축해 주었다. 내 오른팔 위에 자신의 왼팔을 팔걸이삼아 얹고 걷는 그의 환한 표정에 수줍음이 있었다. 그는 어쩌면 오랫동안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게 자신을 의지한 적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를 접수계에 인도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고맙다했다. 나는 지팡이를 잡은 그의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그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현관문을 벗어나 건물 모퉁이를 돌다가 나는 다시 뒤돌아서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영혼을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그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그는 이미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 영혼과 나란히 보조를 맞추면서 병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쩌면 천천히 쉬엄쉬엄 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러 온 천사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학세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 해외수필문학상. 재미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회원. 수필집: ‘행복은 손해 볼 수 없잖아’ ‘물빛 사랑이 좋다’외
- 이전글{사진} 생각하는 황새 09.09.18
- 다음글{사진} 붉게 타는 사암 '브라이스 캐년' 09.09.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