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문} 죽지 말고 강인하게 살자 / 정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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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말고 강인하게 살자 / 정영근
자살소동! 오죽해서 죽으려고 애섰을 것인가! 누가 감이 그 마음을 헤아려 알겠는가. 누가 감이 그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슬픈 마음 달래다 못해 눈물로 베개를 흠뻑 적시면서 밤을 지새우거나 생사 간에 씨름하면서 고투하는 이들이 세상에 또한 있을 것이다.
갑자기 직장을 잃고 고뇌하는 이가 바닷가로 뒤쳐 나갔다.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적한 바닷가를 천천히 서성이는가했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갑자기 출렁이는 바다로 질주하여 들어갔다. 어쩌자고.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쳐댔다. 점차 바닷물은 깊어 가고 파고는 더욱 높아지자 그만 더 이상은 들어갈 궁리를 접은 듯 풀이 죽은 채로 바다가로 되돌아 나왔다.
신 한 짝 마저 잃었다, 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는 어디를 갈 수도 없었다. 사정은 더욱 딱해졌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는 순간 좌절하여 맥없이 그냥 모래펄에 쓰려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엉엉 울었다, 이젠 온 몸이 모래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정말 세상이 너무 야속하구나 하는 말로 가까이 훈수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그 때만 해도 최선의 호기는 거기 있었다. 육체도 정신도 잠시 멈춰 쉬는 것이다. 전진을 위한 리트릿을 위해서이다, 지금은 육체이고 정신이고 간에 더 나은 욕망으로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만 정중동을 잃고 넘어지기 쉬운 심경의 때이다. 바로 현제가 더 이상은 내려갈 수 없는 그 자리 그것이 어느 누가 자신을 퇴출시킬 수 없는 안정된 순간, 그리고 최선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육체고 정신이고 간에 어떻게 멈추어 설 수 있단 말인가? 어쩜, 이런 때이면 인간 악세레드를 꽉 밟지 말고 변화를 주어 자연스럽게 지혜로운 스톱을 걸 수 있는 여지를 하나님은 주신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이란 반드시 생각할 수 있는 더 나은 고요함의 여유를 선사해 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런 음성 같은 것이 들릴 것이다.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사람이 스스로 절망해서 죽었지 끝장나고 난감하다고 해서 죽는 법이란 없다, 독초가 아니면 풀뿌리 캐먹고도 한 세월 살 수 있다, 산 생명에게도 반드시 길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서라도 사는 길이 생긴다.
“나를 의지해 보지 않으렴. 죽지 말고 강인하게 살아 보자구나. 이런 충언을 듣고 어떤 이는 의아해서 사람이 얼어 죽지 않더냐?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인간에게는 불가항력의 경우는 어디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잘못으로 죽는다. 얼어 죽을 장소에 있었기에 죽었다. 그 먼저 생각이 죽었기에 거기 있어 죽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 죽는 것은 그 먼저 절망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살고자 욕망하면 살 길은 주어진다.
사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는 것 이전에 그 염려를 수용할 믿음이 요청된다. 믿음이 있으면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신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신다. 실속 없는 말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사실 외로움과 고독을 체험해 보지 않는 사람은 말할 자격을 잃는 것이 사실이다. “외로움, 외로움은 죽음 보다 더 힘들기에 나는 그 외로움을 사랑하다가 죽는다.” 어쩔 수 없이 외로워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한 가지가 그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신념의 강인한 힘이다. 주님은 그것을 주신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각 보다 훨씬 강인한 힘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거기에는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는 신령한 레이저 광선이 있다. 누구든지 구하고 찾으면 얻는다. 그 빛이 “참 빛”(요1:9 참조), 곧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사람은 그 빛을 받아야만 참으로 산다.
문자적으로 빛 이야기 한 가지를 말해 보자. 쥐를 독에 넣고 빛을 완전히 차단하면 그 쥐는 3분을 살지만 아주 조금만 빛을 더하면 36분을 살 수 있다. 모든 생명에 관한 빛의 효능은 마찬가지 공식이 된다. 이 세상은 똑 같을 수는 있지만 빛이 환하게 공개된 독 속이다. 바로 이 빛이 생명의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주님께 다시 한 번 자신을 맡긴다면 빛 되시는 주님이 살게 하실 것이다. 넉넉하게 살게 하실 것이다. 전혀 염려할 것이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룻소는 해변이 아닌 한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다. 이 때 같이 걷고자 하는 이가 나타났다, 룻소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여보게, 나는 스무 번이나 이 연못에서 투신자살하려고 했네.” 이 때 이 말을 듣고 있던 이가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왜 이 때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소?” 라고 묻자 “물속에 손을 넣어 보니까 몹시 차가워서 견딜 수 있어야지.” 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가 죽지 못한 것은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 서러운 눈물로 죄 없는 베개와 이불을 적실 필요는 없다. 강인하게 살기로 하자. 그것이 주님이 주신 믿음이다. 은혜롭게 다시 살자. 은혜 위에 은혜를 주신다. 주가 살아 계신다. 참 빛, 그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의 빛이시다.
그런데 다른 쪽을 바라보라. 연상 밀려오는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의 파도에 푹 빠져 보자. 그대는 소망스럽게 다시 태어나고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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