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수석장로 체험기 / 한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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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장로 체험기 (1) / 한만선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수석장로에 선임됐다는 것이다. 수석? 이것은 아무나 하는 직책이 아니다.
나 같은 얕은 신앙의 소유자가 맡을 일이 아니다. 나는 항상 의심하고 머뭇거린다. 무슨 일이건 믿음으로 하지 않고 인간의 기술이나 능력을 먼저 생각한다.
나 같은 순수하지 못한 신조를 가진 자가 맡을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속한 교단의 기본 교리에 더러 의의가 있다. 나는 내가 수긍하지 못하면 믿지 않는다. 그래서 따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
교회에 연금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가난뱅이가 맡을 일이 아니다. 연초에 약속한 교회운영 연금을 한 해도 제대로 완납한 적이 없다. 약속한 건축연금이나 십일 금이나 혹은 어떠한 특별헌금도 제때에 내거나 완전히 다 드린 적이 없다.
수석이 되면 교회의 살림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필요하면 집을 팔아서라도 교회를 꾸려나가야 할 텐데 나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큰돈이 아니면 적어도 푼돈만이라도 필요할 때마다 돌려 써야 할 텐데 내겐 그만한 능력도 없다.
나같이 책임감이 없고 추진력이 없으며 지도력이 없는 자가 맡을 직무가 아니다.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 스스로 하지 남에게 시키지를 못한다. 미안해서 그리 못한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한다. 난 말할 수 없이 소심하다.
나는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하다. 하지 말아야 할 일도 간혹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도 가끔씩 간다. 그리고 먹지 말아야 할 것도 어쩌다 먹을 때도 있고 보지 말아야 할 것도 간혹 본다.
나는 말주변이 없고 성질만 급하다. 무슨 일을 당하면 차근차근 생각하질 못하고 감정이 앞서고 성깔이 앞서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서슴없이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거침없이 한다. 첫째는 이렇고 둘째는 저렇고 하며 조리 있게 따지지 못하고 말을 더듬고 성질만 급하다. 그리하여 대개의 경우 일을 그르친다.
나는 소견머리가 없고 주변머리가 없고 한마디로 말해서 뚜렷하고 변치 않는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다. 이사람 말을 들으면 이사람 말이 옳게 들리고 저사람 말을 들으면 저사람 말이 옳게 들린다. 무슨 주장을 하러 갔다가 단번에 도리어 설득을 당하고 돌아온다.
나는 무슨 일에나 자신이 없다. 내 자신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웬만한 일에도 자신감을 잃고 있다. 나 같은 못난 놈이 직업을 가지고 가장이 되고 아내를 거느리며 자식을 기르는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내가 큰 교회의 수장이 되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면 언제나 켕긴다. 상대에게 특별히 잘못하거나 모자랄 것도 없는데도 그저 켕긴다. 남들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매우 겸손한 사람인 줄로 안다.
나는 특별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겐, 단지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에겐 깍듯이 존경을 표한다. 그리고 받들어 모신다. 형님처럼 삼촌처럼. 그리고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겐 몹시 조심스럽고 어렵게 대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신경을 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일지라도 어떤 면으로는 나보다 훨씬 낫고 또 어떤 때는 모든 면이 다 나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서기도 한다. 그렇거나 말거나 아랫사람은 과감하게 대하고 때로는 눈 따악 감고 훈시도 하고 견책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나 자신이 아주 밉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너무나 보기가 싫어서 거울까지도 멀리한다. 나는 내 얼굴을 안보고 며칠씩 살기도 한다.
내가 보아도 나는 신의가 없고 비겁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고 하는 짓마다 목마 땅하다. 수십 년간 예수를 믿어 왔는데 내 품성은 변한 데가 없다.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지 안 믿고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를 지경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다른 차가 조금만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해도 금방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온다. 쌍. 제기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심한 욕도..........
다 줄 듯이 선량하게 굴다가도 어느 순간에 아주 이기적이고 형식적인 면을 드러낸다. 세상에서 제일 신앙이 깊고 은혜가 넘치는 사람처럼 말을 해 놓고서는 돌아서면 악마처럼 간악하고 얄미운 사람이 된다. 말 할 수 없이 온순하다가도 갑자기 화를 내고 이기적인 인물이 된다. 이중인격자처럼, 칠면조처럼, 위선자처럼.
어떤 때는 감동을 받아 사랑이 넘쳐나서 입에 든 것도 빼내어 남 줄 생각을 하다가도 한 순간이 지나면 정 반대가 되어 이번에는 남의 입에 든 것까지 빼내 먹을 궁리를 다 한다.
이런 인간인 내가 기독인입네, 장로님입네 하고 척 자세를 잡고 앉아 있을 나 자신을 생각하면 스스로 구역질이 난다. 기도는 물 흐르듯이 듣기 좋게 그럴 듯이 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나 하는 짓은 어김없이 마귀의 할아비같이 하는 나,
남이 하는 일은 그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오해하기를 떡 먹듯 하면서 내 자신의 수많은 나쁜 버릇은 하나도 제대로 고치질 못하고 있는 나.
자리에 누우면 온갖 음탕한 생각을 다 떠올리고 돈을 보면 욕심이 태산같이 나를 짓누른다. 은혜스런 설교를 들으면 눈물을 빨래 짜듯 흘리다가도 한순간이 지나면 눈에 독기가 서린다.
찬송을 부를 땐 솜털처럼 가볍고 따뜻했던 마음이 다음순간 어떤 일을 만나면 얼음장처럼 냉정해진다. 좋은 책을 읽으면 부드럽고 선한 마음으로 가슴이 쿵쿵해졌다가도 어느 새인지 그것은 간악하고 악독한 마음으로 변해 버린다.
그런 꼴임에도 어떤 때는 남의 선행을 의심하거나 비난하기도 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에 나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하나도 고쳐진 것이 없다. 신체조직은 날로 쇠퇴되어 가고 있어 죽을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나는 아무 준비가 없다. 욕심도 못 버렸다. 미움도 못 끊었다.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았다.
데데한 친구 보면 울화가 치민다. 딴 짓하는 친구 보면 울화가 치민다. 교회에는 별별 사람이 많을 텐데 도대체 나는 무슨 수로 그들을 지도할 것인가.
그러한 내가 선거위원장의 전화 한 통에 몇 마디의 대응도 못해보고 단번에 수석 직을 수락하고 말았다. 아, 불쌍한 나.
자아,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별 도리가 없다. 선거위원장의 말씀 마다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치고 우선 나는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아무개도 잘 해냈고 조 아무개도 잘 해냈다. 역전 지게꾼도 잘 해냈고 동대문시장 생선장수도 잘 해냈다. 나는 그래도 모태교인이요 비록 중퇴는 했을망정 신학대학도 좀 다닌 사람이다. 많은 사람과 교분이 있으며 어쩌면 힘깨나 쓰는 일부 교인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못 갈 곳은 안가면 된다. 라스베가스 출입은 절대로 안 된다. 그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말자. 술이 나오는 모임에는 발을 끊어야 한다. 안 마시는 데야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하는 것은 옛날 얘기다. 그것이 중요한 문학 모임이라도, 혹은 먼 친척들의 잔치모임일지라도 일단은 발을 끊어야겠다.
못 볼 것은 안보면 된다. 어차피 시간낭비인 싸구려 연속극 따윈 보지 말자. 비밀한 장소에 소장해 둔 건전하지 못한 그림이나 CD, 비데오 따위는 없애 버려야 한다.
생각을 달리하는 교리나 신조는 얘기를 꺼내지도 말고 아예 생각지도 말자. 내가 뭘 안다고 남들이 고생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이론을 반박하고 반대하는가.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따르자. 그러니 나는 별 문제가 없다. 장담한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성품만은 변화되어야 한다. 못된 성품은 고쳐야 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떤 일에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점에서 본을 보여야 한다. 아랫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목사들을 정성껏 도와야 한다.
나는 예수를 만나려고 산에 올라갔다. 거긴 어느 개신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이 있다. 나는 전에 이 기도원에 두 번 와 본 적이 있다. 두 번 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기도원이 있다 해서 그것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 보려 고였다. 또 한 번은 누가 거기까지 좀 태워다 달래서였다.
그땐 그저 그런 곳인가 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왔지만 이번만은 그렇질 않다. 이번에는 그냥은 못 돌아간다. 반드시 예수를 만나서 새사람이 되어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성령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속속들이 겸손하고 인자하고 신심이 깊은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늘 화평하고 안정돼 있으며 얼굴이 밝은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얼굴에서 값싼 물욕의 땟물을 지워야 한다. 금세 흥분하거나 증오하거나 생각 없이 발언을 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모든 나쁜 습관들을 확실하게 지워야 한다. 항상 성실하고 부지런하여야 한다.
나는 계곡을 따라 파 놓은 여러 개의 바위굴 중 하나를 골라서 기어 들어갔다. 굴은 사람 하나 들어가 누울 만한 공간을 갖고 있었다. 안쪽 끝에는 희미한 전등 하나와 조그만 꼬마책상이 놓여 있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시설이 돼 있었다.
굴 입구에는 사방에 꼭 끼는 문이 달려 있다. 그것을 닫고 불을 끄면 천지는 완전히 암흑으로 덮이고 만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어진다. 시간은 그 의미를 잃는다.
‘하나님,’
나는 조용히 하나님을 불렀다. 나는 이번에 꼭 예수를 만나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은 못돌아 간다. 내게는 새로운 신앙적 체험이 필요하다. 나는 신앙적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 나는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얍복강의 야곱과 같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나는 여기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도를 시작하였다. 말의 순서를 정하지 않았다. 기도를 잘 하기 위하여 좋은 단어를 고르지 않았다. 속도를 조절하지 않았다. 강약을 고려하지 않았다. 어조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오는 대로 말했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고함을 치면서도 말했고 낮은 소리로도 말했다. 기관총알처럼 빨리도 말했고 황소걸음처럼 느릿하게도 말했다. 이말 했다가 저 말을 했다. 한 말을 또 하기도 하고 계통이 다른 엉뚱한 말도 했다. 땅을 치면서고 했고 벽을 긁으면서도 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팔뚝에 시계가 있었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기도가 한동안 끊길 때가 더러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냥 졸기도 했다. 졸다가 깨면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다. 조는 일이 잦으면 그냥 몇 시간이고 잠을 자기도 했다.
목이 마르면 가지고 간 물병의 물을 마셨다. 나는 금식을 계획했었음으로 물 이외의 음식은 가지고 가지 않았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물만 먹으면 사십일은 견딘다고 하였다. 나는 사십일을 견딜 각오가 돼 있었다.
한번은 큰 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드릴 말씀이 너무나 많아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내용의 기도가 앞을 다투어 입술과 혀에 발성되기를 요구하였다. 입술과 혀는 어떤 말부터 차례를 잡아 말해야 할 지 몰라서 그만 크나큰 혼란이 왔다. 급한 김에 입은 모음을 생략하고 자음만 발음하게 되었다.
“브브브브르르르트트스프흐흐”
“프프프르ㅡ즞즈즈즈므므르크므”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를 중단하였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천천히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얼마지 않아서 다시 나는 매우 급한 상황이 되었다. 어디 내 죄가 한둘뿐이던가. 그동안 말만 번드르하게 해놓고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 죄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이기심이 그렇고 물욕이 그렇다. 증오심이 그렇고 허영심이 그렇다. 위선과 교만과 거짓과 태만과 분노와 음욕과 무엇과 무엇과.........
나는 다시 말의 질서를 잃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위선에 관한 뉘우침과 교만에 대한 뉘우침의 말이 같은 시간에 튀어 나왔다. 이번에는 모음만이 발성되었다.
“우우우워워워워애앵이이오우”
누가 들었으면 저 양반이 방언을 하나 하고 갸우뚱 했을 게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아니 몇 날이 지났는지, 어쩌면 몇 달 몇 년이 지났는지 나는 기력을 거의 다 잃은 지경이 되었다. 힘이 없어서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불을 끄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눈에 띈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깜깜한 세상의 연속이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머리 주변에서 자꾸 떠나려는 정신을 겨우겨우 잡아 붙들었다.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깡그리 사라지고 말 것만 같았다.
“주여,”
나는 남아 있는 힘을 다 모아 부르짖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면서 하얀 눈발이 온 하늘과 땅을 덮어 왔다. 보이는 것은 어지러이 떨어져 내리는 하얀 눈발이었다. 온 세상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 내리는 벌판에 홀로 서 있었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그리고 앞을 보고 뒤를 봐도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오직 허옇게 내리는 눈발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만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하였다. 혹시?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머리를 강하게 저었다. 나는 내가 천당에 오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었다. 아니면 지옥에라도? 그럴 리도 없다고 곧 판단하였다. 손에 굴속 바위의 차가운 느낌이 그대로 감촉되었다.
나는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 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좌우로 돌고 또 위아래로 돌았다. 나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나는 허우적거리면서 최후의 힘을 다 쏟아내어 문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바깥세상은 찬란한 빛이 넘치고 있었다. 눈을 뜰 수 없었어도 그것은 알 수 있었다.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빛이 내 눈을 방망이로 내려쳤다. 나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햇빛에 바란 지렁이 꼴을 하고 굴 앞 길바닥에 나자빠졌다.
나의 금식기도는 이렇게 끝이 났다. 예수를 만나려했던 계획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는 들것에 실려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내가 굴속에 체류한 시간은 하루를 넘지 못했다. 허기야 그 정도일지라도 그것은 내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사는 별일 아니라고 했다. 영양실조에 과로가 겹친 상태에서 매우 짧은 시간동안 뇌혈관이 막히었었다고 했다. 안정을 취하면 곧 원상태로 돌아갈 것인즉 안심하라 했다.
뇌혈관이 막히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뇌혈관은 육체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육체에서 나온다는 말이 된다. 그건 옛날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한동안 회의와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이나 진리 등은 모두 정신에 속한다. 이런 고귀한 정신이 한갖 피냄새 나는 썩을 뇌에서 나온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정신은 육체와는 관계가 없는 데서 발생하여야 할 것이거늘.
사람들은 선천적, 후천적 생활환경에 따라 각기 사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신앙하는 데도 원칙은 같으나 실천하는 데는 약간씩 그 모양이 다르다. 사람이 각기 사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도 잘못이 아니듯이 신앙의 실천방식이 다르다 하여 나쁠 것은 전혀 없다. 장로는 이 점을 잘 알고 편견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는 가라지도 있고 알곡도 있다.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다. 섞여 있어서 구별이 어렵다. 천사같이 보이는 악마도 있고 악마같이 보이는 천사도 있다. 가짜 사랑도 있고 소량의 사랑도 있다. 깊은 사랑도 있고 덜 깊은 사랑도 있다. 사람이 얼굴이 다 다르듯이, 지문이 다 다르듯이, 눈의 홍채가 다 다르듯이 속마음이 모두 다 다르다.
인격자라 해도 그 정도가 다 다르고 지각의 많고 적음도 제각기 다르다. 선량한 마음의 정도도 다 다르고 좋고 나쁨의 정도도 다 다르다. 장로는 이런 모든 부류의 인간들을 한결같이 포섭하고 공평하게 대하여야 한다.
내가 처음 중요하게 시도한 일은 신자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인사를 잘 하자는, 인사운동이었다. 나는 매 예배 시간마다 반시간, 혹은 한 시간씩 먼저 교회에 왔다. 교회 문을 들어오는 모든 신자들을 정문 입구에서 맞았다. 예배가 마치고 나갈 때는 목사 바로 옆에 서서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였고 할머니와 처녀 그리고 혼자 사시는 여자분 과는 가볍게 포옹을 하였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은 교회 뒤에 서거나 뒷자리에 앉아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비하였다.
일반적으로 장로들은 얌전을 빼고 혹은 점잖을 빼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기 마련이었고 일이 필요할 때엔 마치 손님인양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앉아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기가 일쑤다. 그러다가 공중기도나 교회 손님소개, 광고 등을 부탁하면 뽀르르 등단하여 멋진 말솜씨를 자랑하기가 일쑤다. 나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어떤 장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요리 빠지고 조리 빠진다. 대접받을 일에는 제일 먼저 나서고 대접할 일이 있으면 멀찌감치 쳐진다.
나는 장로회의를 교회 바깥 주차장 한가운데서 진행하였다.
“장로님들은 앞으로 교회에 오시면 늘 주차장에 나와 계십시오. 매사에 모범을 보이시고 교회를 위하여 언제나 봉사하십시오. 하다못해 쓰레기라도 주으십시오. 무슨 일이거나 남에게 미루지 마시고 솔선수범해 주십시오. 언제나 신자들이 잘 보이는 곳에 계시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지 즉시 도와주시도록 하십시오. 손님이 오시면 그들이 돌아 갈 때까지 직접 챙겨 드리십시오. 그리고....”
이런 소리를 듣고 좋아할 장로는 없을 것이었다.
“껍죽대는 꼴이라니. 평생 처음 수석 한번 되더니 되게 건방을 떠는군 그래.”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었을 게다.
어떤 젊은 장로 하나는 노골적으로 내게 모욕을 주기도 했다.
어느 날 내가 막 도착한 그의 차께로 가서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장로님”
그러자 그 젊은 장로는 내게 아주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이었다.
“노인네가 교회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계시지 뭘 한다고 밖에 나와서 이렇게 야단법석입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내가 열어준 자동차 문짝을 안에 앉은 채로 쾅 하고 도로 닫는다. 대꾸할 말이 없다. 고약하다. 되게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나는 우물쭈물 그 자리를 떴다.
어떤 장로는 나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는 그가 맡은 일도 하지 않고 회의에도 참석하는 법이 없다. 그가 그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만약 나라도 그 일을 대신 해 놓으면 그는 월권했다고 대들 것이다.
견디다 못해 한번은 그를 찾아가서 일을 속히 좀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제가 좀 바빠서요.”
그는 여유 있게, 아주 느긋하게 대답했다.
“바쁘시면 다른 사람에게 좀 시켜도 되겠습니까? 원체 그것이 좀 급한 일이라 서요.”
그는 눈치가 빨랐다. 나의 말은 직책을 내놓으라는 뜻이었는데 그가 금세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사표를 내려고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사표를요?”
나는 약간 화가 나 있던 참이라 마침 말이 났으니 이 일을 당장 해결해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정 그러시다면 오늘이라도........”
나는 당장 사표를 받아 버렸다.
그래 놓고서 그날 급히 소집된 임시 직원회의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려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 장로는 기분이 나빠서 그날 이후로 교회에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마땅한 후임이 없어서 그 자리는 임기 말까지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일만 망쳐버린 꼴이 돼버렸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엔 내(중대장) 말 한마디면 수백 명이 그냥 그대로 따랐는데 여기선 내가 열 마디를 해야 겨우 한 사람이 따를까 말까 할 형편이었다.
그런대로 시간은 흘러서 한 서너 달이 지났을 즈음에는 장로들이 교회 입구나 주차장에서 휴지를 줍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면 모든 장로가 다 줄을 서서 예배당을 나오는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식당에서 손님들은 인사하러 오는 장로들 때문에 자주자주 먹는 일을 중단해야 했고 장로들의 웃음소리가 교회 안팎을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장로들이 이렇게 열심을 보이자 집사들도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맡은 일을 완수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어떤 일이고간에 펑크 나는 일이 없었다. 필요한 것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 반드시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의 희생적 봉사는 모든 교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교인들은 예배에 빠지는 일을 삼갔다. 예배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회의든 자기가 참석해야 될 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기도회에도 어김없이 참석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다.
한번은 교회에 갔더니 대단히 번쩍거리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강대상 아래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 배달되어 왔다는데 누가 보냈는지 아무도 알 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벌써 여러 번의 조율을 해서 아무래도 소리가 신통치 않다던 오래된 피아노는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피아니스트의 얘기를 들은 지 한 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힘들게 알아낸 피아노상에게 피아노를 사서 교회에다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그저 어떤 사람이 와서 현금을 지불하고 피아노를 샀을 뿐이라고. 그걸 어디에다 배달해 달라고만 하여 자기는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자기가 아는 것은 오직 그 사실 뿐이라고. 그러고 있었다.
목사에게 물어봐도 모르고 장로들과 집사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결국 내가 알아낸 것은 그 피아노를 사서 헌납한 사람이 ‘나는 아니라’는 사실 뿐이었다.
만일 내가 피아노를 헌납했다면 야단법석이 났을 것이었다. 주보에 그 사실이 공포되고 피아노의 수명장수와 거룩한 사용을 위한 특별예배와 특별기도회가 개최될 것은 물론 그 선행을 기리는 대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었다. 피아노의 어느 잘 보이는 부분에는 금박으로 쓰인 내 이름이 붙어 있을 것이고 여럿 앞에서 내가 목에 힘을 주면서 감사패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보라. 그는 오른 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지 않았는가. 남에게 공치사를 받지 않을 생각으로 그는 예상되는 모든 인간적 낯간지러운 행동을 죄다 멀리 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그의 신앙의 깊이는 나의 그것보다 월등하게 깊다. 참으로 대단하다. 그야말로 그는 수준 높은 신앙의 소유자다. 이런 신앙의 고수가 우리 교회에 있다니. 할렐루야. 주를 찬송할지어다.
이런 모범적인 선행이 영향을 준 것인지 그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연금이 수억 원, 그러니까 몇 십만 달러가 불어났다.
나는 교회 회계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헌금한 사람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장로님,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꼭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아아, 세상에 이렇게도 단순하고 순진한 일꾼이 있다니.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 기로 서니 자기는 알고 있으면서 이 교회의 최고 책임자인 나는 모르고 있어야 하다니. 졸병은 알고 대장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어처구니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알아야 된다. 그러나 회계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수석장로가 요구하면 회계는 신자들의 개인 연금내역을 수석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교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고스럽지만 지난 한달 안에 연금을 낸 분들의 명단과 그 액수를 좀 뽑아 주십시오.”
회계는 명단을 뽑아 왔다. 결국 나는 그가 누군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금년에 장로 안수를 받은 K장로였다. 고마운 K장로,
교회 재정이 넉넉해지면 모든 교회 사업에 활기가 생긴다.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한다는 일은 없게 된다. 뭐든지 계획을 세워라 우리에겐 넉넉한 재정이 있다.
돈이란 쩨쩨하게 아끼면 더럽고 치사하다. 그러나 시원하게 좋은 곳에 잘 쓰면 그것처럼 좋은 게 없다. 돈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선행을 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 어찌 좋지 아니하겠느냐. 아, 돈이란 게 뭔지. 나는 왜 이렇게 돈 앞에선 약해지는지.
다음날부터 K장로는 나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제안하는 일은 대개가 옳게 들린다.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대 찬성입니다.’
그가 계획하는 일이면 나는 언제나 찬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K장로와 왜 그렇게 잘 지내는지 모를 것이다. 내가 그를 신임하고 좋아하는 것은 결코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줬으면 싶다.
헌금은 돈이 많이 있다고 내어지는 것이 아니다. 재물 있는 곳에 마음 있다고 큰 재물엔 큰마음이 따르는 법, 그가 신앙이 얇았으면 어디 한 푼인들 교회에 바칠까. 그만한 믿음이 있고 그만한 감동이 있기에 그만한 돈을 낸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K장로는 사람이 찬찬하고 천성적으로 고운 마음씨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질서와 순리에 따라 행하고 요행이나 모험, 투기성이 있는 것은 삼가는 편이었다.
그는 어떻게나 나를 잘 도와주는지 그가 있으면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내가 앞에서 무슨 일을 꾸려 나가면 그는 언제나 내 뒤에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는 교회 일이라면 누구한테라도 꼭 그렇게 봉사적이고 헌신적이었다.
그는 과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입산한 경력도 있고 어떤 때는 극단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무리들을 따라 이곳 저곳을 헤맨 경력도 갖고 있었다. 그처럼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한때 그런 사교집단에 현혹되기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우리 교회는 K장로 덕분에 한동안은 돈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나는 교인들의 영적 부흥을 위하여 뭔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은 결과로 매주 일요일 새벽에 기도회를 갖는 일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주 일요일 새벽에 기도회로 모였었는데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중단된 채 있었다.
나는 목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새벽 기도회 말씀입니까? 사람이 모여야지요. 한 두명 모아 놓고 하다가 그만 뒀습니다.”
“사람이 안모이면 모이도록 하셔야지. 그럴 중단해 버리면 어쩝니까?”
“글쎄요. 나올만한 교인이 원체 없다 보니까........”
“됐습니다. 한번 시도해 봅시다. 반드시 잘 될 겁니다. ”
직원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새벽기도회 실시를 통과시켰다. 거기다가 새벽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아침식사를 제공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새벽 기도회는 뜻밖에도 예상 밖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장로와 집사들을 비롯한 수십 명의 교인들이 기도회에 참석을 하였다. 거기다가 동네 조기 축구회 회원들까지 모두 참가하였다. 그들은 새벽기도회를 먼저 끝내고 축구를 하러 갔다. 동네 축구가 끝나면 다시 교회에 와서 교회가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였다. 조기축구회원들은 불신자들과 신자들 반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불신자들 중 몇은 나중에 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새벽기도회가 잘 되자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기도반이 조직되었다. 선교회와 여성 선교회. 구호봉사회, 찬양대, 그리고 모든 구역 반에서 따로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모여서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할렐루야, 복 받은 우리 교회여. 기도가 끊이질 않으니 감사할 일이 떼 지어 몰려오는구나. 몇 달 사이에 교인의 수가 두 배가 넘게 되었다. 손님으로 잠간 들렸다가 교인들의 친절과 사랑에 혹하여 그대로 교인이 되어 눌러 앉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교회 근방으로 이사를 와서는 이 교회가 어떤가 보러 왔다가 그날로 입교의사를 밝힌 사람이 많이 생겼다. 이웃의 권고로 교회를 방문했다가 그냥 교인이 돼버린 사람도 많이 생겼다.
빈자리가 많아서 넘보기가 부끄러웠던 교회가 이제는 자리가 모자랄 지경으로 꽉 차게 되었다. 이렇게 신나는 일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할렐루야.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입상. 해외문예지 ‘올림’ 단편소설 당선. 미주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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