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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도산 안창호선생과 SDA교회와 관계 / 민 병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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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림문학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10.08 09:38 조회수 6,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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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선생과 SDA교회와 관계 / 민 병 효

서언 : 1882년 정부는 미국과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민 길이 열리자, 사회가 봉건압제와 외세 찬탈 등으로 불안과 궁핍의 와중에 있을 때이라 1993년까지 7천220명의 이민자들이 조국을 떠났으며, 또한 1910년 한일 합방으로 민족의 수난이 시작되자 조국을 떠나 해외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애국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대표자들로 리승만, 안창호, 서재필, 김마리아, 박용만, 5 분만이 각 독립운동사 책에 알려 졌으나, 임기반 재림 선구자만이 누락되어 묻혀있던 현실에 있을 때 삼육대학 이종근 교수께서 재조명하면서(경기일보에 연재된 제목, 도산 안 창호선생과의 인연, 민족계몽과 독립운동, 하와이에서 민족계몽운동과 정치단체 신민회 등 조직, ) 밝혀졌다. 도산 안창호선생은(1878년생), 10년 연배인 임기반선생(1867년생)과 이웃동네에 살면서 같은 선각자의 눈을 뜨고서 일제침략에 대항해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안창호선생과 SDA 교회와의 관계”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위 두 분들은 우리 교회가 시작된 선돌교회와 학교(1904년 교회, 학교 1905년, 용강군)가 시작될 때 바로 도로가 경계인 강서군 남산리교회와 같은 해 창설되었는데, 이 때 임기반씨는 한국교회의 선구자인 제1호 침례자로 기별을 전할 때 이웃(남삼리 임기반, 용강 안 창호)에 살면서 도산 선생과 임기반선생의 인연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남삼리교회 창설자인 이석관씨의 맛사위(딸 이 혜란)로 더욱 교회와의 인연을 깊게 맺었다. 또한 두 분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이민관계로 계몽 차 임기반선생이 하와이로 가시는(당시 도산선생은 리버사이드 오랜지농장에 계시다) 길에 재림 기별을 받습니다, 이후 두 분은 본국에서, 중국에서, 미국에서 민족계몽, 정치단체 조직, 독립운동으로 평생을 몸 바쳤습니다.
아래 항목에 따라 서술하겠습니다. 마지막 5째 항목은 ‘안도산의 문화유산(동상건립)과 나의 역할’(로마린다교회) 그 제목은 홍명기장님로께서 직접 서술했습니다.

1, 안 도산선생과 임기반선생의 활동
1)같은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운동 투사입니다
“구한말 여명기 선구자중의 선구자 근당(槿堂) 임기반(林基磐), 도산 안창호선생의 10년 연배로 이웃동네에 살며 일찍부터 선각자의 눈을 뜨고 동고동락하며 일재침략에 대항해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민족혼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최근 학계를 중심으로 독립협회, 하와이 민족계몽, 신민회조직, 국채보상운동, 조선독립청년단 조직, 독립자금모금, 한국 재림교회활동 등 그동안 잠들어 있던 애국활동이 베일을 벗기 시작하면서 그의 헌신적 일대기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이종근교수)
정부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1882), 이때부터(1903~1905) 3년간 7천220명이 이민 길에 올랐는데 우국지사들이 이민 무리에 섞여 있었다. 임기반은 노동 이민을 모집하는 개발회사의 진남포 지사 직원으로 일했다. 이민자중 많은 수가 문맹자들이었고, 일찍이 기독교 신사상을 받아 드린 신자들이며, 지사들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원대한 포부를 가진 자들이다. 안도산선생도 1902년에 이혜련과 결혼하고 다음날 임기반선생의 주선으로, 오산 이강과 함께 이민 길에 오르게 되었다.
1903년 안도산, 오산 이강, 임준기 이분들은 노동자들의 계몽운동이 절실히 필요함을 목격하자 임기반을 초청하여 함께 일하면서 계몽한 결과 코리안 젠틀맨이라는 칭호로 불렸고 동포들의 신뢰를 받으며 동포들끼리 상부상조하는 친목단체를 1903년 8월에 한인 첫 정치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게 되고, 공립협회와 흥사단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두 분은 중국에서, 고국에서 민족계몽과 교육,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평생을 구국애로 몸 바쳤다.
2)같은 기독교 신앙인으로 민족계몽에 선봉자이다
안도산은 개화초기부터 깊은 사상이나 높은 수준의 학자는 아니었다. 14세부터 17세까지는 유학을 배워 사서삼경을 마치고, 곧이어 밀러(F.S. Miller)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고, 서구식 교육은 17세의 소년으로 3년간 수학하고, 1896년에 조직된(임기반씨도 함께)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감리교인으로 함께 신앙을 나누면서 서재필의 사상과 독립정신을 배양하였다.
임기반은 4살 때 천자문 전부를 외우고,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소년시절부터 중국 고서에 정통하였다.
17세에 과거에 합격한 그는 한문학자요, 유창한 언 변가이다, 이왕실에 한문습작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앙반과 천민의 신분을 배격하고,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고, 자유와 민권운동에 선구자였다. 이로 인한 도산과 근당의 신앙과 사상이 일치되어 신앙인으로 뜻이 통하며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인연이 깊게 맺어졌다.
3)해외교포(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의 계몽과 교육
그 후 임기반씨(1867년 5월 5일)는 노동 이민을 모집하는 진남포 개발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지원자들을 모집(대부분 기독교 신자)하였는데 이 구실로 피신해 있는 구국지사들을 우선적으로 도우면서 도산 안창호선생의 미국행을 도왔다. 사실은 노동자 수출이지만 망명 투사이었다.
1902년에 도산선생은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센프란시코에 도착, 1904년에 SDA교회와 기관이 중심된 리버사이드로 이사하여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면서 하와이 노동자들과 합류하여 한국인 타운을 형성하고, 리버사이드에 한국어학교를 세우고, 1911년에 다시 돌아와 14년에는 타 지방 여러 곳에 영어강습소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소속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세 곳 클레어몬트와 버클리, 멕시고등에 학생 양성소를 설립하여 1년에 $500씩 보조하였으며, 그는 “나는 교육자로서 일생을 바치는 것이 소원이라”하였으며 연구하고 싶은 분야는 교육 행정론이라 하였습니다. 안도산선생은 대 교육자이며 정치가입니다. 그는 22세 때 1899년 고향(강서군 동지면)에 최초의 남녀공학 사립초등 점진하교를 세웠고, 1907년에는 미국에서 돌아와 대성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안도산은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하여 기본 교육관(철학)을 덕육(德育 ), 체육(體育), 지육(智育) 삼육(三育)을 근본으로 삼았다. EG White의 “교육” 저서(248P)가 1894년에 출판되었으니, 안도산선생은 교육자로서 책을 구하여 (리버사이드에 있을 때) 연구하였을 것입니다. 모르지만 한국 우리 교단에서는 최초에 세운 선돌(입석)에 광염(光鹽, 빛과 소금)학교, 순안에 의명(義明)학교, 동명(東明)등 학교라 칭하였으며, 삼육대학교 인명록 책 연혁에 보면 1947년에는 조선 합회 신학교라 칭했고, 수복하여 1951년에 삼육 신학원이라, 교명을 개칭한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1951부터 공식적으로 삼육의 전인교육 철학인 EG White의 교육이념에 준하여 ‘삼육’이라 하였습니다.

2, SDA교회 창립자(임기반)와 안도산선생과의 인연
1), 남삼리교회(1904년 8월 창설)와 안도산선생과 관계
남산리교회는 선돌교회 다음으로 창립된 교회로 창설교인 두 분이 특별히 안도산선생과 인연이 맺어진 관계이다. 한분이 이석관씨로 아들 두 분(이원식, 이면식)과 딸 세 분(이혜련, 이진실, 이++)인데 첫 사위가 도산 안창호선생이시고, 둘째 사위가 김창세 의사로서 고명덕사모님(김선억목사)의 외오라버니 되시며, 교비로 세브란스의과를 졸업하고, 순안 병원에서, 중국 우리교회 홍십자가 병원에서도, 교회 사역을 시조사 2대 사장(한국인으로는 첫 번째 사역자)으로 시작하여 사역을 하시다가 미국에 오셨고, 그는 국가 유공자로 연금을 위생병원에 회사한 당시 신실한 교인으로서 동서간입니다,
한국 재림교회 선구자이신 임기반선생도 용강군 정화리 선돌교회 가까이 사시면서 이웃한 안도산선생과 뜻을 같이 하여 민족계몽과 교육에 독립투사로서 함께 몸 바친 동지인지라 그 인연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안도산선생과 임기반선생의 관계는 지면관계로 다음 기회로 하고 생략하겠습니다.
남삼리교회 창설자이신 최형진선생은 현 로마린다교회에 출석하시는 최순신사모(전 서울 위생병원 총무 김근응의사)의 선친으로서 당시 지방의 유지요, 자본가로 안도산에게 독립자금 후원금을 모아 지원하였으니 이 모든 역할 등은 교회를 중심으로 맺어진 인적관계라 볼 수 있습니다.
2), 안도산선생이 SDA교회를 이해
그는 대 교육자요, 사상가요, 정치가요, 실업가임을 그의 1905년에 창간된 공립신보(共立新報), 신한(新韓)민보(1907년)에 기고된 글을 살피면 정치가요 실업가임을 알 수 있고, 윤병욱 저서 “나라 밖에서 나라 찾았네. 기타 논설에서 습독했을 때 그의 교육철학이 사상과 정치가로서 실천한 원동력을 찾았음을 보아 어찌 그리 EG White의 저서 “교육”철학과 같은지 그는 감리교 교인이지만 종교와 교육은 SDA교회 신념에서 계몽과 교육과 독립운동을 성취한 교육자, 사상가, 정치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전인교육으로 삼육을 흥사단의 실천이념으로 관철시켰고, 노작교육을 통한 일인일기(一人一技)습득으로 부강한 국가건설, 인지(人智)를 종교에서 덕을 제일로 삼은 인성교육 등은 “교육”책에서 깊이 연구한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안도산은 “나는 교육가로서 일생을 바치는 것이 소원이다” 이력서에 “학교 관리법”이라 썼다.
“밝은 미래재단”의 회장 홍명기장로의 원고에서도 “우리 민족으로부터 존경 받는 훌륭하신 안도산선생이 되기까지는 임기반씨의 신앙심과 물심양면의 지원이 큰 역할이 되었고, 밑거름이 되었던 점을 안도산 가족들도 기억하면 좋겠다.” 홍명기장로는 안도산 가족과 친밀한 인연으로 재림교회의 선구자 임기반씨의 역할뿐 아니라 SDA 교회와의 맺어진 가족관계며 해외에서 활동할 수 있게끔 자금 지원까지 말한 것이라 봅니다.
3), 사모 이혜련의 역할
1910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망명을 하고 있을 때 보낸 편지 “나는 항상 몸이 나라 일에 매여서 가사를 돌아보지 못하므로 집안 식구가 오랫동안 해어져 있는 것도 염려가 되거니와 ......장차 아이를 교육할 힘이 없을까 염려하나이다. 우리가 한 때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고생하고 죽는 것은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거니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어린 자식을 교육하지 못함을......
독립운동에 전념하여 가정과 자녀에 대한 직무를 다 못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심정을 아내에게 고백한 서한입니다. 나라와 가정을 놓고 볼 때 안도산은 국가의 존립과 국민들에 대한 사랑에 비중을 더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내의 편지 한 토막을 보면 “조카의 혼례식에 참석하시게 귀국해 주십시오. 그러나 나중에 남편을 이해 못했음을 후회한다는 마음을 상해로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말을 하지만, 막상 뱃속에 있는 유복자의 임신 사실도 남편의 걱정을 덜기 위하여 이야기를 못했다고 합니다.
사모께서는 가정에서 자녀들의 교육과 뒷바라지며 찾아오시는 손님들 접대 미국 거주시는 유학생들의 돌봄과 지역봉사 등으로 바쁜 생활과 일정이지만, 남편에게 용기와 필수품 전달에 애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 해외 민족계몽 활동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자들(SDA교회 중심과 해외)
1), 남삼리교회 최형진(창립자)선생 중심
최형진선생은 최순신사모(전 위생병원 총무 김근응장로)의 선친되시며, 남삼리교회를 이석관(안도산선생의 맏사위, 딸 이혜련)선생과 함께 교회(1904년)를 창설했으며, 우리 교단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1905년) 국민(초등)학교인 광염학교(光鹽學校)를 함께 창설하셨다.
이웃에 설립된 선돌교회는, 한국에서 제일 먼저 창설된 교회(1904년 9월)로 용강군 입석리에 위치한 남삼리 교회와 도로를 경계한 지역으로, 재림교회 선구자신 근당(槿堂) 임기반선생과 또한 한국교회 첫 안수목사이신 이근억(조광수장로 외조부) 첫 사역자(선돌학교 선생,학생 10명)이시다. 즉 최형진, 이석관, 이근억, 임기반등으로 이루어진 교회 중심과 해외자금 지원 등이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최순신사모의 글을 보겠습니다.***
최대웅(최순신사모 조부) 할아버지는 강서군 남삼리에 사셨고, 1904년에 남삼리교회 창설자시고, 아들이 3형제인대 다 의명학교와 둘째아들 화진은 상해삼육대학을 마치고 향리에 돌아와 아버지의 땅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 사업에 종사하셨고, 같은 땅에 남삼리교회를 세웠습니다, 할아버지는 지방 유지이며 자본이 있어서 당시 안도산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민족계몽과 교육으로 미국 각지로, 하와이 중국, 소련까지 다니며 활동할 때 많은 자금을 지원하셨다 하였습니다. 한 번은 안도산선생이 18나라 돈을 모아 가지고 할아버지께 보이시며 독립기금 사용을 보고하시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돈을 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세 아들과 세 딸이 있었습니다, 저는 셋째(형진) 아들의 딸입니다, 셋째 딸 남편(이석관)의 작은 고모의 딸이 둘인데 다 의명학교를 수학했고, 큰 딸 이혜련은 안도산선생이 남편이고, 작은 딸 이진실은 재림교 최초 간호사로 노슬원장(선교사)을 도왔고, 남편이 김창세의학박사로 영어에 능통하고, 시조사 2대 출판부장으로 사역을 시작하여 순안병원과 위생병원, 중국 홍십자가병원(교회기관)에서도 사역하시고, 고명덕사모(김선억목사)의 외 오라버니가 됩니다. 안도산선생은 가시는 곳마다, 한 번은 배 안에서 눈물로 우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 호소하시고 모자를 벗어들고 지나가면 돈이 그득 그득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해외 중심으로
2), 해외에서 모금 지원 미국, 하와이, 맥시코, 중국
1919년도에 독립운동 센프란시스코총회 본부에서 재무 강연소가 발표한 모금 액수 1919년도, 87,355달러, 1920년 7월까지 26,873달러,(미 서부) 하와이에서 35,034달러 도합 149,262달라 이고 지금 액수로 30억이다.
중국인 사회에서도 모금액이 7,756달러, 아마 항일운동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개인의 지원금을 들면 쌀의 왕 김종림선생이 3,345달러 비행학교를 설입한 윌로우스가 2만달러, 안도산의 재정후원자 임준기 $1,220, 신광희 $1,045, 김승길 $1,010, 이상은 윤병욱저 “나라 밖에서 나라 찾았네. 에서 뽑음
특기할 사실은 하와이에 이민 오신(1918년 16세) 정영옥여사는 하와이 중심으로 모금을 하였는데 이 분이 화와이 재림교회 창립자가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흥사단을 많이 돕고, 나중에는 이승만박사의 오른 팔 역할을 하여 대통령 취임식에 특별항공기편으로 초청하여 하와이 이민자들과 취임식 특별 귀빈이 되었습니다. 정여사의 자녀 6남매가 다 성공을 하였지만 맏아들이 “캡슬 위생병원” 창설자가 되었습니다.
3), 흥사단원 중심으로 자금 지원
흥사단은 1913년 안도산이 창단한 조직으로 독립운동 구상안에서 “국가건설 최종 목표로 단결과 정신력을 기초로 하여 교육의 증진 및 실업의 진발을 통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준비한다.”
“교육의 증진” 및 “실업의 진발”을 흥사단의 최종 실천목표로 삼육(三育)을 교육철학으로 채택하여 흥사단의 이념으로 삼았다. 안도산선생이 재림교회를 이해한 결과로서 설명한바 덕을 앞세워 덕(德), 체(體) 지(智)라 하였는데 한학의 대가로서 당연하다고 봅니다. 윤리에 기독교를 접목한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남산리교회가 창립될 때 대부분 감리교 교인이 개종한 신도들 중심이었고, 안도산선생 처가로 볼 때 남삼리교회 창설자요 가까운 동지 임기반선생도 감리교회에서 개종하였는데, 사모님도 순안 의명학교를 소학하였고, 또한 동서 김창세박사도 다 같은 사역자인데 안도산선생만이 감리교회에 계신 이유가 어릴 때부터 깊이 뿌리 내린 유교의 대성 한학자인 까닭이라 보아 덕, 체, 지라 하여 EG White의 “교육” 이념을 많이 연구했지 않았나 봅니다. 근당 임기반선생도 4살에 천자문 외고, 14세에 사서삼경을 통달 17세에 과거에 합격한 유교대성으로 종신 재림교회를 지키지 못하시고, 안도산선생과 같이 독립운동 지사로 평생을 바친 애국애족의 인물로 후세에 알려진 것으로만 생각됩니다.
자금 지원의 제목에서 빗나간 것 같습니다. 흥사단에 입단하면 의례히 당회비며 지원금이 부가된 사례입니다. 안도산선생의 광범위한 활동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05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회가 조직되어 회원이 388명, 같은 해 리버사이드 공립회가 조직되어 회원이 218명, 1909년에 레드랜드 등지에 12개 지역에서 회원이 1,111명 또한 신민회를 조직, 이러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회비, 외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지만 민족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서로 돕는 것이 애국심을 발휘하는 것으로 모금이 잘 되었습니다.

4, 안도산선생의 서거와 SDA교회의 인연
1),입원과 순안 식품을 선호
안도산선생을 간호하신 박근실선생은 향년 백수(白壽)로 간호선생으로 은퇴하시고 아직 단정하시고 깨끗하신 용모로 저를 응접해 주셨습니다. 아마 생존하시는 간호원으로는 최고령으로 압니다. 묻는 말을 들으시고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원산교회(1911년경 스미스선교사부부 시작) 출신으로 1925년에 원명학원(SDA 원산교회 학교)을 졸업하시고, 순안 의명학교를 마친 다음 상해위생병원 간호학교로 유학(28~31년경)하셨습니다. 이때에 안도산선생이 상해 두 차례로(첫 번째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두 번째는 윤봉길의거일 계획으로 3년 가령 체류하다가 윤봉길의사의 의거 일에 일본 경찰에 1932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입원하시고, 1938년 (60세)에 당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서거하셨습니다.
***박근실선생의 글***
상해 위생병원 간호학교 재학 시 안도산선생이 한국 학생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찾아 오셔서 이때는 이승만박사가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계실 때 안도산선생은 국무총리 대리로 일하실 때라 학생들에게 장차 한국이 독립되면 여러분들이 애국애족으로 국가를 맡아서 열심히 일할 준비를 하도록 간절한 마음과 눈물어린 심정으로 말씀하신 선생님이 눈에 선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면접하셔 조국의 앞날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 때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활동을 할 때라 만나는 사람도 채포당하는 위험한 정세이었습니다.
한번은 상해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인근 영육골로 소풍을 갈 때 안도산선생을 모시고 갔습니다, 물론 일본 경찰의 호위 속에 갔지요. 다만 하실 수 있는 거듭 거듭 말이 아!! 시원하다 시원해, 아!!! 시원해라는 말 뿐이었다. 물론 입원 중에도 경찰의 감시 하에 담당 간호원만 병실 출입이 허락되었습니다.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경 서울 위생병원으로 와서 일할 때 순안 위생병원으로 파송되어 안도산선생을(아마 옥고중 병세가 악화) 단독 간호했습니다. 이때에 순안병원에는 정식 간호원이 없기 때문에 파송되어 갔습니다. 주치의사와 단독 간호원만이 출입이 가능하였고, 여 조카 한분이 보호자로 출입하였습니다.
저는 환자관리와 약 취급, 배식(음식)을 책임졌습니다. 안도산선생이 상해병원 입원 때부터 위가 몹시 상하여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입원한 것이라 음식 문제가 까다로웠습니다. 순안 식품을 원하셨고, 순안 포도즙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미국식 부드러운 음식을 찾으시기에 내가 직접 요리하여 대접했습니다. 물론 검사를 받아야지요, 왜 위가 상하셨는지 의문이 많이 있었기에 혹시나 내가 일본 경찰에 지령이라도 있었는지 때문입니다. 한 달 가량 입원하시고 퇴원했습니다.
다시 서울위생병원에 입원(1937년경)하셨습니다, 아마 그 동안 서울 종로 감옥에서 고생하시다가 심한 병세로 위생병원에 입원한 것입니다. 물론 이 때도 내가 단독 간호원으로 수고했는데 순안에서 보다 더 철저하게 경찰들의 감시가 심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 온 민족에 한이 맺힌 응어리들이 풀어질 수 없는 지경에 있으니 안도산선생은 속이 다 타버리셨겠지요, 순안병원에서와 같은 책임을 맡고서 간호했지만 더 호전이 없어 당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아니 해외에서 더욱 위생병원으로 귀가 모아졌습니다.
2), 임종시 재림교회 간호사
임종 시까지 우리교회 간호사가 간호하였고, 마지막으로 순안에서 마셨던 순안 포도즙을 찾으시기에 구하여 대접을 하였다는데 임종 간호사의 성함을 알지 못하여 임종의 자세한 사실을 찾지 못합니다. 전해지는 기록에도 찾아 볼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혹시나 성함이나 후손을 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3), SDA교회 은혜를 입은 안도산선생
이항목은 홍명기장로가 쓰신 글과 중복이 되어 생략합니다. 홍장로님의 글을 잘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결언 : SDA교회는 감리교회와 인연이 깊습니다, White장로 부부(하몬)도 감리교회 교인이셨다, SDA교회의 태동기 때부터 많은 노독들은 감리교회 교인이었다. 한국재림교회도 비슷하다. 임기반선생을 비롯하여 1904년에 창설된 선돌교회와 남삼리교회의 대부분의 창설자와 교인들이 감리교회에서 개종하였다. 그러나 안도산선생만은 감리교회의 이름은 간수하였으나 정신만은 재림교회 속에 생활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는 사모님이 창설교회의 가족이요, 의명학교에서 깊은 재림교회의 뿌리가 내렸으니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웃한 천자문 글동무로 시작한 대 한학자로서 재림교회 선구자의 인연 속에 보고 들은 재림기별들, 인적으로 맺어진 친족관계며, 모든 인연들이 재림교회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재림교회의 인연에서 시작된다. 임기반선생의 도움에서 해외운동이 시작되고, 인생의 반려도 재림교인과 출발되고, 미국에서도 재림교회 학교와 기관들 속에서 활동이 전개되고, 심지여 교육철학 이념까지 재림교회의 삼육교육 이념인 전인교육을 전수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재림교회를 사랑하게 되었고, 재림교인들을 사랑했으며, 재림교회 기관들과 학교, 병원과 간호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경성병원에 입원하여 삼육식품 포도즙을 유언으로 찾았습니다. 당시 아무도 임종을 할 수 없게끔 경찰의 감독이 철저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재림교회의 품에서 활동하셨고, 위생병원에서 백의천사의 간호로 안정과 신앙의 평안을 누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해가 안가지만 안도산선생의 문화유산 보존을 재림교회 주최로 마무리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드립니다. 감리교회에서 홍명기장로님을 개종시켜 재림교인으로 안도산선생과 마지막 인연을 맺게 하심을 더욱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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