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맞난 두 하이티 청년
페이지 정보
본문
내가 맞난 두 하이티 청년.<?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3월 4일 2010
양증일 아트랜타 거주
하이티 나라를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한 청년에게 물었다. 무엇이 제일 필요합니까?
청년은 “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시요!” 라고 한말이 뉴스 미디아를 타고 있었다.
2월 24일 아침7시 비행기를 타기위해 4시에 차를 타고 비행장에 갔다. 내차레를 기다리며 시간이 얼마 남지안아 서두르며 내 여권과 비행기표를 보이자 이 비행기는 취소됬는데요! 네명에 선교사를 데리고 이민가방처럼 요란하게 큰 의약품과 옷가지 학용품을 채운 가방들은 줄줄 서있는데….
델타 비행기로 옆나라인 도미니카 로 가서 육로를 타고 차로 하이티의 수도 포트 프린스로 들어갔다. 국경을 넘어가기위해서 기다리는 도중에 한국에서출발한 어느 의대 의료인 30여명의 봉사자가 탄 적십자 버스를 마주칠수있었다. 멀리 한국에서 부터 밤잠을 설치고 많은 여행비를 내면서 이곳 까지 이웃사랑의 손길을 뻣치려 온 귀한 분 들이였다.
가면서 먹으라고 싸준 주먹밥이든 봉투 전부를 선뜻 내놓으며 밥을 잡수어본지 오래시죠? 하고 단장에 손에 우리몴에 점심을 전부 주었다. 동포애로 일어난 일인데 혹시나 주먹밥이라고 깔보고 안잡수셨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하면서 …
나는 수도 포트 프린스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한일이 통역관을 찿는 일이다. 이곳 하이티는 자신들의 본토어인 코레얼 언어를 쓰고 또 불란서어를 쓰며 영어를 쓰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미국에서 유학을 와서 2년 공부를 하고 영어를 할수있는 “쌤” 이란 청년이 연결되 미국에서 이멜을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 포기한 상태에서 전화 번호가 있어서 오자마자 전화를 넣었다. 이친구가 전화를 받고 삼십분내로 이곳에 오겠다는 것이다. 이래서 처음 맞난 쌤은 아직 20대에있는 어린 청년이다. 우리와 함께 환자를돌보고 고생길에 가겠느냐하고 물으니 같이가겠단다. 그리고 형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옷과 생필품을 가져오라고 부탁한다.
우리는 트럭으로 집웅을 씨워 사람이 탈수있게 만든 차에 같이타고 가면서 쌤이 몹시 궁금했던 첯마디가 너는 한국사람인데 어떻게 우릴 도와주러왔냐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1950년 한국 전쟁에 너의 부모들이 유엔군으로 지원해서 한국전쟁을 돕기위해서 와서 피를 흘리고 우리 한국을 도와준 이
- 이전글{시] 홍시 / 임순자 10.03.12
- 다음글{시) 갈증(Desire) / 안삼주 10.03.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