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목탁소리 / 정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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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 정영근
싱그러운 봄날 어느새 발걸음은 선암사에 이르렀다. 절간은 조용하고 적막하다. 그래야 절간이 절간 같다. 그래야 속세를 잊는다. 하긴 더 중한 것이 있을 게다. 스님의 은근한 목탁소리 선율이 절간 구석구석에 스미어오고 온 산야며 대지로 멀리까지 퍼져날 때 절간 같고 운치 있어 보인다.
오죽했으면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저 손아 마 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라고 읊조렸겠는가 싶다. 혹시 주승은 잠이 들었을지라도 땡그랑, 땡그랑 하고 풍경소리라도 나야만 절간답지 않은가. 대체로 사람들이 먼저 들리는 곳은 본당 대웅전이다. 깨끗하게 머리 민 늙은 스님이 납의를 입고 불상 앞에 서서 마냥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 망부석마냥 지그시 눈을 감고 손놀림만 부산하다.
언젠가 일본 교또에 갔더니 절간에는 불상이 없고 목탁소리 마저 없었다. 새로 개혁된 불교라 하는데 목탁소리 선율이 물씬하게 그리워졌다. 아마도 속세인 저마다 듣는 목탁소리엔 그 의미가 다를 게다. 지금 불상 앞을 감돌아 무한 공간으로 번져나는 저 목탁 소리는 무슨 의미이며 무슨 효험이 있는 것일까.
스님의 납의는 사람들이 내버린 여러가지 낡은 헝겊 을 모아 누덕누덕 기워 만든 옷이라는 의미라 하는데, 그가 공을 들인 저 목탁 소리에는 대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속세인의 그 괴로움이나 고통을 담아 마음의 비움과 선과 명상일제의 세계로 합일하는 극치의 의미는 아닐는지-.
아무래도 자연의 질서를 타율 하는 것이겠고 이 강하고 약한 선율의 흐름은 인생의 삶을 고르고 조화 있게 회고하고 타진하며 맥을 짚어 스스로 진단하는 소리로 저마다의 가슴에 와 닿게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어떤 이는 절간에 와서 수양하고 도야한다고 말한다. 들리는 저 목탁소리에 신의 내음 같은 느낌이 들면 사람은 선도의 질서 속에서 오는 감회를 달래게 되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선암사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다행히 이날 한국 불교 계 교육국장이 어린 스님 선도와 수양 차 이곳에 와있다 한다. 5분간이라는 만남의 시간이란 금쪽같은 시간이란다. 내 긴한 이야기는 목탁에 관한 질문 쪽이었다. 산을 하산하면서 생각나는 그의 중한 말 한 대목이 있었다. “저 목탁 소리 고저와 간격의 고르기를 유념해 들어 보시죠. 지금 듣는 저 스님의 목탁소리는 이 나라에서 다섯 분 안에 드는 고명한 분의 것이외다.” 그래 고명하다는 그 스님 목탁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다시 본당 대웅전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목탁을 타율하고 있는 늙은 그 스님 옆모습을 을씨년스럽게 처다 보았다. 망부석 같은 저 머릿속은 어떤 경지일까? 두 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가 세상을 잃었다면 넘어지고 말았을 것을…. 얼마나 진중하게 흐트러짐 없는 도야된 정신 수양인 것일까. 어쩌면 저렇게 목탁의 타율 소리가 한결같고 간격이 자로 재듯 같은 것일까. 이건 진짜 수양인가, 아니면 신의 타율인가 싶어질 정도이다.
기독교회는 어떤가?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는지도 모른 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많다. 사랑의 십자가 만남과 아쉬움의 접근, 타율은 교회라는 집단 안에서 꼭 한결같은 선한 타율인가? 종교는 수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게다. 근원은 몰라도 그 수양만은 내다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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