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실낙원 / 정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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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 정영근
산행을 시작했다. 다만 상쾌한 공기를 심호흡하면서 자연을 명상일제하며 저 적선산 언저리까지라도 천천히 걷고 싶어서 였다. 직장 출근 탓인지 벌써부터 하산하는 이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그런데 유난히 허리까지 긴 머리를 한 아리따운 처녀가 보였다. 눈물을 찔끔 찔끔 몹시 슬픈 모습하며 종종걸음으로 부산하게 하산하고 있었다. 어, 않되지, 않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길 가운데 우뚝 서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행보를 빤히 주시했다. 그녀는 힐끗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비켜가지 아니하고 내 앞에 주춤하고 서고 만다. 부드러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호흡이 거셀 만치 말없이 슬퍼한다. 왜 그러시오? 하는 내 질문에 해어지기로 했어요. 하는 대답 외엔 전혀 말문을 막는다. 슬프면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말을 잘 아는 터였다.
세상은 배우자가 죽는 일 외에 이혼하는 마음의 아픔이 제일 크다는데 아마도 결혼은 아니했을 망정 이들에게는 필시 엄청나게 마음 아픈 순간일거라는 생각에 슬퍼져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서있었다. 나는 울고 싶으면 그냥 많이 우시죠 하는 말 외에 딱한 사정을 해결할 길 없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참의 순간이 흘렀을 게다. 그런데 때마침 내 뒤에서 아마도 나를 향해 누구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젊은 청년이었다. 난 산행하는 사람이요. 라고 정중하리만큼 가만이 대답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끝내는 가만이 내 앞까지 왔다. 아직도 마른 들풀을 비비고 선다. 정적이 흐를 만치 청년은 아무 말이 없다. 난 청년의 신이 튼튼해 보여 좋소. 사람도 튼튼해 보여 좋소이다 그려! 라고 말했다. 그는 웬 걸요 라고 직 답 말을 한다.
나는 청년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실낙원’을 아시오? 그들은 비록 실낙원은 했지만 손에 손을 잡고 거친 길 내려왔다오. 라고 그러자. 그는 예,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고는 고개를 숙여 꾸벅 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청년은 듬직하고 침착해 보였다. 금방 호감이 가고 정감이 가는 청년이었다. 그래서 한 마디를 더했다. 전 고려대생입니다 했다. 고대생이라니 무슨 뜻이요? 라고 물었다. 고대생은 두 번 다시 부족하지 않습니다….고개를 돌리더니 현정아, 같이 가자구나 했다. 그러니깐 언뜻 그 말은 나 보다는 그녀를 향한 말이었겠구나 싶었다. 그는 조심스레 현정이 어깨를 부여잡고 거친 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어쩌면 둘이 다 저렇게 키가 크고 나란해 보일 수 있을까 싶어졌다. 현정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가다가는 뒤를 돌아봤다. 난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직도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는 상 싶었다.
그래, 마음 상해주고 놀래주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하긴 네 말 대로 고대생이니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했지 않았더냐. 석구야, 안심이구나. 길을 내려가다 다시 올라가고 고개를 넘는 순간까지 나는 주시하여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쪽으로 빤히 바라보이는 여름 하늘은 여름인대도 유난히 완숙한 천고마비의 가을 하늘 같기만 한 것이 웬 일일까. 인연이 인연 되어 서로 긴하게 사랑하는 젊은이들, 그래서 난 영원까지 사랑하여라 라고 막 기원하는데 마치 이 말을 엿들은 듯 고갯길을 이쪽으로 다시 넘어 재비 새끼 얼굴 내밀듯 둘이 다 같이 나란히 보이고 손을 흔들어댔다. 나도 부지런히 손을 마구 흔들어댔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미처 알았겠는가 만은 지금쯤 석구와 현정이는 어디서 무엇하며 어떻게 사는지 그때가 못내 그립다. 잊어질 수 없는 짧은 인연, 오늘도 내 가슴엔 그 때 그 순간이 아련하게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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