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목 잘린 카네이션 / 정영근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목 잘린 카네이션 / 정영근
어머니 날 행사에서 아내가 자기 가슴에 달아준 향내 짙은 카네이션 몇 송이를 집에 가지고 돌아와서 탁자 위에 댕그랑하고 놓았다. 가만 보아하니 카네이션은 처량하기 그지없도록 주눅 들린 신세였다. 목이 잘린 채 그에게만 감기는 특유의 진 초록색 붕대가 찬찬 감겨져 있었기에 말이다. 난 이 놈들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날의 산업적이고 기업적인 사람의 사고는 이렇게 다양한 꽃들을 대량 재배하여 때가 되면 모두 사정없이 목을 치거나 발목을 쳐 쓰러뜨린 후 사람을 기쁘게 하느라 질펀한 자리에서 이렇게 선을 보이는 것이겠다. 아내 맘이 내 맘과 일맥상통한 건지 아내는 그 불쌍한 카네이션 몇 송이를 선물 받은 나지막한 청색 무늬 용기에 담고 애지중지하며 물을 부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도 카네이션은 절망하지 않았는지 싱싱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카네이션은 남유럽, 그러니깐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석류 과의 다년초로 여름에는 향기 있는 홍색, 백색의 고운 겹꽃의 관상용이다. 꽃의 아름다움을 꽃답게 보기만 하면 되련만 편리하고 좋을 대로 가까이 두기 위해 사람들은 이놈들 목을 치는 것이다. 수년 전 일이다. 오늘 운명의 장난인지 이 목이 잘린 카네이션이라는 놈은 내 친지가 죽을 지경 되어 긴 병원 복도를 타고 응급실로 황급히 옮겨가던 마지막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때를 연상케 한다. 목을 치면 죽는 거지. 우린 카네이션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네 목을 치더냐? 우리가 네 절 받자고 해서 네 목을 치다니 말이다. 참 미안하구나. 라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예쁜 화병에서라도 오래 오래 살 거라고 당부 말을 했다. 이때로부터 아내는 날마다 정성 드려 물을 갈아주며 키웠다. 목이 그만 싹 뚝 잘려 버렸으니 그 키가 자라나는 것은 아니지만….아내는 늘 화사하고 청순하게 웃는 진 붉은 그 모습 하나 하나를 반기며 기뻐해주었다.
하루는 아내가 나더러 여기 와서 이것 좀 보라고 했다. 이봐요. 지금도 싱싱하지 않아요. 한 거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얼른 다른 쪽 또 한 놈이 돋보였다. 요 놈은 왜선지 많이 말라 그만 퇴색되고 죽을상이 되어 퍽 측은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보기에 그렇게 좋아보이질 않았다. 어쩜 화병 다른 싱싱한 놈들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하고 있는 모습 같아만 보였다. 영화가 시들면 그런 게지만…. 대개 이런 때이면 그놈만을 쏙 골라내어 냉큼 쓰레기통에 처넣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난 버릇대로 그렇게 해야 할 찰나였지만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러다가는 주춤하여 다른 생각을 해냈으니 말이다. 너 더러 애초에 고이 자라 거라. 예쁜 카네이션아. 했지 않았더냐. 그런데 그랬으면 그랬지 왜 지금 와서 쉬 변덕을 부리는 것이냐. 이제 와서 그 모습 조금 시든다 해서 냉큼 그 놈만 빼내서 던져버린다니 말이 되는 거냐. 난 그러지를 못 하겠구나. 난 이 세상살이에서 바로 그 꼴이 싫어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이렇게 되뇌었다.
그래서 우린 합의했다. 싱싱한 놈들은 싱싱한 대로, 시든 놈들은 시든 그 대로 거기 함께 두고 반기자고. 고풍도 좋고 신풍도 좋은 거 아냐 했다. 모두 다 그 생을 마칠 때까지 그들을 오붓하게 감싸 주며 예뻐 해 주자고 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푹 숙이고 진땀 흘리던 놈이 고개를 번쩍 쳐들 듯 일어나면서 고풍스런 중세기 르네쌍스 문명의 진 붉은 희귀 종 열화의 미와 자태와 향을 다시 뿜어내는 것만 같아 보였다. 알고 보면 정말 사람의 주관적이고도 쎈스티브한 정교함이란 이렇게도 민감한 것이었나 보다. 우린 아, 큰일 날 번했지…. 르네쌍스 카네이션아! 넌 지금은 작지만 로마의 칠 능 전각에 서려있던 바로 고풍스런 너였지 안았냐고 했다. 이젠, 정말 네 자태 그대로 이 화병서 오래 있어만 다오! 그랬다.
- 이전글{수필} 쉬미리 아쩨레트의 날에 체포된 여인 10.05.21
- 다음글{시} 사슴의 꿈 / 주진석 10.05.1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