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쉬미리 아쩨레트의 날에 체포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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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미리 아쩨레트의 날에 체포된 여인
쉬미리 아쩨레트의 날이 밝아오고 있다. 7일 동안의 초막절이 끝나고 8일째 되는 날이다. 제사장의 뜰에는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으나 이 날만은 남녀노소는 물론 아이들 까지도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소실점을 찍으신 분이지만 그의 일생은 여전히 구약의 영향권 아래에서 생활 하셨다. 바로 제사장의 뜰에서 10 계단만 더 올라가면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은 오늘 날처럼 설교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양을 잡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결국 예수께서도 그들에게 붙잡혀 양처럼 피를 흘려야 될 것이었다. 사두개 교인과 바리세인의 고발이 없어도 예수님은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경륜을 이루실 분이었다. 사형수에게는 반듯이 죽음의 날이 찾아오듯 종국이 뻔한 사실 앞에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행포는 우주의 뜻을 질러가고 있었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양을 잡아 제사 드리던 바리세 파, 성전에서 제사장 직을 수행하던 사두개파들은 그림자의 실체가 여기에 계신데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법에 넘기려고 혈안을 굴리고 있다. 그때 예수님은 담대하게 성전 앞 제사장의 뜰에 서 계셨다. 바로 이날은 쉬미리 아쩨레트의 날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설교 내용은 생수의 강에 대한 말씀이었다. 예수님이 이러한 제목으로 설교를 하신 것은 한 여인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예지 예정은 적중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설교를 하시다가 오른 쪽 방향으로 걸어가시면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종종 사물과 더불어 실물교훈으로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어떤 때는 꽃을 보면서 설교하시고 또 어떤 때는 새를 보고 설교 하셨다. 그 주위에는 군중들이 그를 따라 가며 말씀을 듣고 있다. 그때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어느 한 곳을 주시 하셨다. 그곳에는 엷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쭈그리고 앉아 죽음의 형장에서 애절하게 흐느끼고 있다. 여인의 둘레에는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이 방금이라도 돌로 쳐 죽일듯한 기세로 서 있다. 이곳은 평지에서 160 미터나 높은 계단을 올라와야 되는 곳이다. 죄지은 여인을 질질 끌고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원수진 자들이나 빚진 자들을 교회에서 수치를 주려 한다. 교회 밖에서 거래한 흥정꾼들이 교회에서 해결을 보려는 그들은 결코 바리세인들보다 낳지 않을 것이다. 여인을 끌고 온 그들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꿀리고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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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인을 어떻게 하리이까 돌로 쳐 죽이리이까?”
그들의 질문은 직선적이었다. 손에는 주먹만큼이나 큰 돌이 쥐어져 있다. 이렇게 큰 돌을 여인의 머리에 던지면 직사할 것이다. 유대인의 법에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밤이 맞도록 대중들에게 하신 설교에는 생수의 강을 마시는 자는 형벌을 면하고 새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설교였다. 말씀을 듣던 군중들은 유대의 법을 깨고 새로운 군주가 임재 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곳은 여인의 뜰, 연보 궤 옆인데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사형장에 끌고 온 간음한 여인과 똑같이 예수도 고발하기 위하여 책을 잡고 있었다. 사두개파와 바리세파는 서로 반대파였으나 예수를 잡기위해 하나가 되었다. 이 엄청난 모략 앞에 서 계신 예수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고 태연하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무서운 도전을 받고 계셨다. 만일 예수께서 유대의 법을 따라 돌로 쳐 죽이라 하셨다면 밤이 맞도록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민중들 앞에 예수님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죽이지 말라고 하시면 예수님은 관중들 앞에서 체포당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였다.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간지 6개월 동안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갈릴리에서 보내셨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전으로 올라오신 것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돌을 쥔 관리들의 손에는 식은땀이 돌을 적셨고 대중들 역시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실 까였다. 침묵이 흐른다. 온 천지간에 침묵이 깔렸던 천지창조의 직전과 같았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셨던 것처럼 돌을 쥔 자와 간음한 여인의 흑암에 깔린 깊음 위에 예수님의 사랑에 젖은 연민이 바람처럼 운행하고 있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마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고 우주에 선포하신 그 말씀과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예수님의 짧은 설교는 우주에 울려 퍼졌고 모세가 홍해를 찢어 갈랐던 기적처럼 간음한 여인의 흙 빛갈나는 죄의 휘장을 찢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훗날 구속 사업을 완성하는 날 성소의 휘장도 이렇게 찢어질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앉으셔서 흙에 무엇인가 손가락으로 기록하시고 계셨다. 이것은 분면 4000년 전 아담을 창조하실 때와 같은 손이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던 그 손끝이 지금은 흙바닥에 무엇인가를 기록함으로서 죄인의 마음을 재창조하고 계셨다. 이것은 온 우주 간에 굳게 언약을 맺을 구속의 경륜의 전주곡이었다.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던 관리들은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떠났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죽이려든 자가 어디 있느냐” 여인이 말하기를 “아무도 없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가라 다시는 엷은 옷으로 살을 드러내지 말거라 그리고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으라.” 하셨다. 두꺼운 옷은 성도의 따뜻한 의의 옷이다. 우리도 머지않아 하늘에 가면 흰옷을 입을 것인데 분명 이 옷은 가는 베실로 짠 흰 두루마기가 아니라 성도의 옳은 행실이다. 결국 에덴의 회복은 아담의 회복이다. 죄를 짓기 전에 아담은 의를 입고 살았다. 우리도 그와 같이 의의 두루마기를 입게 될 것인데 이것은 걸치는 두루마기가 아니라 벌거벗고 살았던 아담의 회복이다.
광야 생활 40년의 긴 여정의 서곡으로 모세의 마음을 불태웠던 떨기나무가 지금 간음한 여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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