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술대 위에 눕는 마음으로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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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대 위에 눕는 마음으로 / 하정아
나는 한 작은 종합병원의 수술방 회복실에서 일하는 간호사다. 수술환자들이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이나 감각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돌보아주는 것이 임무다. 매 5분 혹은 10분마다 생체반응을 점검하며 일대일 밀착간호를 한다.
회복실 한쪽에는 대기실이 있어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머문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환자를 인터뷰하고 수술에 필요한 사항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곳이다. 환자의 상태가 수술과정을 견딜 수 없다고 진단되면 케이스가 전격 취소된다.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들의 자세를 지켜보며 감동한다.
대기실 환자와 통성명을 하고 안면을 트는 일은 환자간호에 필수다. 간호사에게는 수술 전후의 환자의 의식 상태를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고 환자에게는 수술 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잠깐 동안의 대화를 통해 지성과 교양과 품성을 가늠할 수 있다. 부와 권력과 명예, 혹은 지식과 지혜조차도 원초적인 상황에서는 도움이 안 된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은 품성임을 확인한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환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수술 전 예의 있고 조용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폭력적이고 무례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지한 욕지거리를 거침없이 해대는데 그 화려하고 원색적인 표현에 웃음이 절로 난다. 욕은 세계 어느 나라 언어든 그 내용과 의미가 똑같다. 환자의 손을 잡으며 타이른다. “어느 나라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프랑스어? 독일어? 어머나, 미안해요. 저는 그 나라 언어를 모르거든요.” 환자는 더욱 난폭해거나 혹은 잠잠해진다. 때리고 꼬집는 환자도 있다. 복싱 선수의 펀치를 피하듯 환자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요리조리 잽싸게 피해가며 필요한 간호를 한다.
모든 수술은 작든 크든 위험을 안고 있다. 젊고 건강하여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예상했던 사람도 뜻밖에 많은 문제를 안겨줄 때가 있다. 호흡곤란을 일으키거나 혈압이 뚝 떨어지거나 출혈이 멈추지 않아 응급사태가 일어난다.
보통은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문질러주면 잠을 깬다. 따뜻한 담요로 몸을 감싸주고 가슴에 손을 얹어 호흡을 독려한다. 환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살아있음을 표현하는데 반갑고 기쁘다. 수술, 일종의 죽음 아닌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어제의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수술 전 환자는 몸에 부착된 액세서리들을 모두 떼어내어야 한다. 안경, 시계, 반지, 팔찌, 목거리, 귀걸이, 발가락지, 틀니는 물론이고 눈초리, 코, 입술, 혀, 배꼽을 뚫고 매달려있는 고리들도 떼어낸다. 장식물이 참 많구나, 새삼 놀란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임을 다시 확인한다. 매달거나 장식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인간의 속성이 안쓰럽다. 서로의 손을 잡아주어야 할 증거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진다.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떼어놓은 뒤 낡은 수술가운을 입고 대기실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순하고 겸손해 보인다. 진실하고 맑아 보인다.
내 것을 주장하고 싶을 때마다, 억울하다고 느낄 때마다, 수술대 위에 눕는 자신을 생각한다. 마음을 치장하고 있는 거추장스런 장신구들을 떼어낸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허영과 고집과 변명을 내려놓는다. 삶의 모든 수식어를 버린다. 나의 본연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가면을 쓰게 만드는 타이틀도 벗는다. 살아있음만으로도 넉넉하자, 스스로를 추스르며 호흡을 다듬는다.
'문학세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 해외수필문학상 수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행복은 손해 볼 수 없잖아' '물빛 사랑이 좋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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