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재림문학 '신인상 공모' 수필당선작 / 주영희
페이지 정보
본문
식욕의 노예 외1 / 주영희
나는 중독환자이다. 알코올중독자와 마약중독자가 혈중과 노중에 알코올과 마약성분이 배출되듯이 나의 핏속에는 혈당이 높고 소변에도 당이 배출된다. 몽롱하고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나른하다. 알코올중독자가 알코올을 끊으면 괜찮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맛있는 밥, 국수, 팥빵, 아이스크림, 쵸코렡 등을 끊기만 하면 당장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줄 알면서도 무덤 같은 목구멍으로 자꾸만 음식을 집어넣는 중증 음식중독환자이다. 맛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쑤셔 넣는다. 마음이 급하거나 화가 나면 더욱 그렇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에베소 4:19) 이 말씀의 감각 없는 자가 바로 나임에 틀림없다.
저녁식사를 하지 않거나 가볍게 하면 다음날 아침에 몸과 마음이 산뜻할 것인 줄 알면서도 잠시의 유혹을 못 이겨서 남편과 경쟁하듯이 먹는다. 항상 내일부터는 안 그래야지 하면서 가득 찬 위장으로 잠자리에 든다. 그런 다음에는 꿈속에서 밤새도록 쫓겨 다니면서 헤매다가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을 여러 번 끄곤 한다. 이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마지막순간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서 아침식사도 못하고 도시락도 못 챙기고 헐레벌떡 출근한다.
일하면서도 계속 하품만 한다. 종종 있는 교육시간이나 회의 때면 영락없이 내려쳐지는 눈까풀을 주체할 수가 없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지면 원래는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아주 약하게 만들어서 마신다. 일하면서 어쩌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괴물을 방불케 한다. 작은 눈은 퉁퉁 부은 얼굴에 파묻혀서 더욱 실눈이 되었고 머리는 부스스하고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푸석푸석하지만 어떻게 하고 싶은 의욕도 없다. 새 옷을 사본지도 오래된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알뜰하게 살림하느라 그런 줄 알지만 사실은 살을 뺀 다음에 맵시 있는 작은 사이즈의 옷을 사 입으려 하다가 여태까지 못 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에 찍히기를 오래전부터 기피해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까 가족사진마저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가족들에게도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남편과 애들은 눈에 콩깍지가 끼었는지 아니면 거짓말이나 위로하는 말인지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아니올시다 이다.
과식을 한 다음날이면 손끝이 둔해져서 뭐든지 잘 떨어뜨리고 흘리고 넘어지고 행동이 뜨악하다. 시력도 희미해지고 뒷걸음질하는 느낌이다. 나의 내장속의 뒤섞여진 음식물들이 연소하면서 내뿜는 열로 인해서인지 얼굴과 손은 기분 나쁘게 뜨뜻미지근하다. 또한 혼합된 음식물들이 부패분해 되면서 분출되었을 가스로 인한 중독 때문인지 정신은 몽롱하고 정확한 판단이 힘들다. 그나마 오랫동안 즐겁게 익히 해오던 일이어서 직무이행에 별 차질은 없지만 일을 하는 속도가 줄어든다. 평소에 비교적 예리한 판단으로 인정받으면서 재빠르고 능률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으로 자부하고 있던 나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어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심한 허기가 온다. 위장이 비니까 정신은 맑아지기 시작하지만 과식 후에 심하게 상승했다가 갑자기 곤두박질 쳤을 혈중의 당이 직원휴게실을 들락거리며 달콤한 군것질을 불러들인다. 직원휴게실에는 케이크, 도넛, 초클릿 등 달콤한 군것질거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마약중독자가 마약기운이 떨어지면 또 마약을 찾아 헤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음식물의 노예적 속박의 수레바퀴에 꽁꽁 묶여서 자꾸만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고린도후서 3장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고 또 그렇게 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병색이 가득한 나쁜 습관으로 절어있는 모습으로는 예수님의 편지는커녕 걸림돌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간호사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건강식에 대해 관심도 많고 우리 교회의 특별한 건강교육으로 인해 어떤 음식을 얼마만큼 어떻게 먹어야 할지 알고 있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족에게 건강식과 건강한 생활방식을 항상 강조하고 있으며 건강식을 만들어서 식탁에 올린다. 스스로는 그렇게 못하면서 절제생활 또한 강조하고 있는 나는 위선자임에 틀림없다. 알면서도 안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이런저런 핑계도 많다.
같이 일하던 동료 둘이 싸우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은 담배를 지독하게 피웠고 다른 한사람은 심한 비만이었다. 비만이었던 이가 담배피우는 이에게 "담배 그만 피워" 라며 혼내는 것처럼 크게 나무라고 있었다. 그 말에 화가 난 담배피우는 이가 "너는 그만 먹어" 하면서 맞서서 한참 이상한 언쟁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낯이 뜨거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도 그만 먹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여태까지 큰 병 없이 아직도 이렇게 숨 쉬고 걸어 다니고 있으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등학교시절에 읽었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에서 주인공이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소량의 초라한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과정을 온 몸의 촉각을 동원하여 간절하게 느끼면서 음미하는 모습에 못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나의 마음에 자극이 올 때 마다 여러 번 식습관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의 모습으로 슬그머니 되돌아 가버리곤 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 후서 2장22절의 이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니 나는 개나 돼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조상 하와할머니도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어 우리 인류의 운명을 망쳐버렸고 부처님도 과식으로 인한 위장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에서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동생 야곱에게 넘겨주고 말았지 않은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식욕 때문에 이렇듯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뿌리까지 뽑히고 있으니 동료의식을 느껴 약간의 위로가 되긴 하지만, 머리가 쭈뼛해질 정도로 무서워진다. 잘못된 식생활이 온갖 흉측한 질병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화 되어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세치 혀를 만족시키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영혼을 팔아넘겨 버리기 십상이다. 가볍게 웃고 넘길 일은 절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식욕의 절제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콩과 석청으로 연명하며 자신을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고 깨끗하게 지켜서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훌륭하게 해내었다. 다니엘 또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리라 뜻을 정하고 왕의 궁중의 산해진미를 멀리하고 절제된 식생활을 했다. 그는 단순한 식생활을 유지하며 하루에 세 번씩 열렬하게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함으로 연로한 나이까지 지력이나 체력이 남다르게 뛰어나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는 광영을 입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을 금식하시고도 음식물에 대한 마귀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스가랴 4:6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라고 하였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도 절제가 들어있다.
그러면 내가 이 악습관의 쳇바퀴를 떨치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세상의 산해진미나 인생들의 온갖 육신과 안목의 정욕에 나를 맡기지 않고 나를 깨끗하게 지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말씀과 성령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별 것도 아닌 식습관이 내 영혼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결론도 나온다. 겨우 먹는 것을 두고 이렇게 단단하게 무장해야 하는 내가 우습게 느껴지는 것 또한 위험한 함정일 것이다.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잠언 23:2 에서 나의 식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미리 경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서워해서도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나를 변화 시켜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또 내 몸을 일컬어, 나를 지으신 그 분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백번을 죽어도 아깝지 않을, 끝 간 데 없이 비루한 나를 이렇게 존귀하게 여겨주시는 분은 다시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셨다. 기억력이 나쁜 나는 자주 그 사실을 잊거나 등 뒤로 밀쳐버리는 배은망덕을 밥 먹듯 하는데 또 따라 오셔서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여태까지 나 자신이 내 것인 줄 알고 절제 없이 내 속에 집어넣고 생각 없이 살았지만 내 것이 아닌 더군다나 하나님의 것인 이 몸뚱이를 계속 혹사하고 산다면 멍청한 나는 고사하고 그분께서 또 다시 얼마나 아파하실까.
나의 연약함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여기까지 오는 인생길동안 커 보이고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던 일들을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아름답게 해결해주셨듯이 이 것 역시 그분의 계획대로 선하게 인도 하실 것을 나는 믿는다. 나를 그의 편지(고린도 후서3:3) 라고 하셨는데 그 것은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생명인 말씀이 나의 연약한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제는 나도 욥처럼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를 믿고 따를 것이다. 그 앞에 내놓고 나의 하루하루 매 순간 순간을 온전히 그의 것으로 살고 싶다. 그래도 혹시 또 자빠져서 코를 깨는 한이 있어도 나는 다시 일어나서 내 마음의 고삐를 맡기고 주신 성전인 이 몸을 아름답게 꾸며갈 것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 2:22) 아직도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있는 나의 손을 그분은 놓치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안다. 매순간 붙들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입고 나의 부끄러운 음식물의 노예적 속박의 악순환을 깨고 나와서 꿈에서도 나를 잊지 않고 문 활짝 열어두고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그 자유의 땅을 나는 꼭 밟을 것이다.
나의 가을
가을이 한창이다. 나는 가을이 시작되는 날 태어났다. 그 것을 나는 축복으로 생각한다. 살갗에 부딪쳐오는 무르익은 가을의 청량한 공기는 내 인생을 더욱 부유하게 만든다. 고등학교시절, 수험준비에 숨 막히던 어느 수업시간에 얼핏 창틀 너머로 내다보이던 샛노란 은행잎들이 내 가슴을 마구 방망이질을 해대던 날부터였나 보다. 나는 가을의 색깔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함박눈처럼 마구 쏟아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이렇게 아름답게 마감을 하면서 세상을 기쁘게 해주고 사라져가는 나뭇잎들로 인해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 아름다움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내년 봄 새 모습으로의 소생에 대한 소망으로 더 큰 설렘을 남겨두고 간다.
나의 인생도 이제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져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입어가면서 정신없이 달려왔던 길을 돌아보니 다시 되돌아가서 고쳐놓고 싶은 것들이 무척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되돌아 갈 수가 없다. 26년 전 고향땅을 뒤로하고 이 개월 된 핏덩이를 품에 안고 이역만리 먼 길을 남편 찾아왔다가 아직도 귀향하지 못하고 이제는 아예 여기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지금 내가 있는 이자리가 아직도 안착할 곳은 아니지만 여기 까지 오기에도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던 뜨내기였다. 그래도 이 동네에서 머무른 세월이 나의 인생여정동안 지나쳤던 어느 곳에서보다 길다. 여기서 아들도 낳고 우리 애들의 대부분의 성장이 이뤄졌던 곳, 그래서 제 이의 고향이라고 억지로 이름을 붙여볼 만도 하지만 역시 어색하다. 그러나 항상 그리던 내 조국 한국 땅에서의 피부에 와 닿는 낯선 느낌은 나를 더욱 외롭게 했다. 이 것 또한 이 세상에 혹해서 질척하게 엉덩이 뭉개고 퍼질고 있고 싶은 마음보다 하늘 본향을 사모하고픈 맘에 불을 지펴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다행이리라.
22년전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영어도 서툴면서 준비도 없이 직장으로 바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긴장감속에서 주눅 들어 숨죽이고 살았던 나날 속에 있던, 무시해도 될 것 같던 어정쩡하고 어쭙잖은 보잘 것 없는 내 손을 꼭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씩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5년 전 간호사주간에는 천여 명 중에 열 명의 하나로 선정되어 내 사진이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곳곳에서 전시되었다가 그 이후에는 교육관에 진열되어있다. 우리병동의 교육용 소책자를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이 지역의 보건소와 이웃병원에도 비치되어 많은 한인산모들에게 한국어로 읽혀지고 있다. 지난 몇 년 전부터는 우리병동의 여름기간 인턴간호사 교육담당을 해오고 있다. 나는 나의 직업과 직장환경을 좋아한다. 내가 슬프거나 스트레스에 쌓여 있을 때 내 환자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다보면 나의 태산같이 커보이던 고민은 작아져 버리고 만다. 나의 환자들과 직장동료들을 좋아한다. 비록 피부색깔은 다르고 자라온 환경과 문화적 배경이 다르지만 20여년 같이 일해오던 동료직원들과 내 인생여정의 정겨운 친구가 되었다. 생일과 좋은 일을 서로 축하해주고 어렵고 아픈 일도 같이 아파해주면서 이제는 제2의 가족이 되다시피 한 나의 직장동료들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같이 하기도 한다. 대부분 비슷한 나이들이고 자녀들 또한 비슷한 연령들이다. 우리 혜은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우리병동식구자녀 17명이 한꺼번에 졸업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로의 자녀들이 자라가면서 만들어가는 여러 가지 색깔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백인들 틈에 끼여 노란색 피부를 가진 나를 가끔은 잊어버리기도 하면서 같이 늙어가고 있다.
순간순간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만치 와서 오던 길을 되돌아보니 온통 실수투성이다. 특히 자녀교육이 그렇다. 꽉 쥐면 깨어질 것 같고, 느슨하게 쥐면 놓쳐버릴 것 같아서 언제 조이고 언제 풀어야할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완전히 다른 한국과 미국의 두 문화 사이에서 혼란을 겪을 때는 안타깝기만 했다. 처음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는 뿌듯한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뒤뚱거리다 넘어지면 철렁 떨어져 내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늘아버지의 나로 향한 가슴앓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스무 살이 지나서 성인이라고들 하지만 내 눈에는 언제나 물가에 내다 논 철부지로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꿈속에서까지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는, 나의 삶보다 더 귀중한 내 분신들이다. "탯줄(The Cord)"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와 내 아이들을 묶어둔 내 심장에 붙어있는 보이지 않는 끈이 나를 당겨서 내 심장을 멍들게 하고 상처를 입혀도 이 끈은 둘도 없는 나의 생명줄 이다.
하늘아버지께서는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한 나에게 과분한 아이들을 맡겨주셨다. 귀한 아버지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허락해준다면 백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다시 혜은이와 태영이의 엄마이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거친 세파에 부대끼며 살아가야하는 애들을 바라보며 가엾고 애처로워서 애가 끊어져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항상 뒤쳐지고 미숙한 부모노릇을 하면서 자식농사 잘못 될까봐 조바심했지만 그 농사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나를 찾아오셔서 내 손을 붙잡고 여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인도하신 아버지께서 우리 애들의 인생에 일일이 선하게 참견하시고 손 꼭 잡고 끝까지 인도하실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이제는 잠시 맡아서 키우던 아버지의 귀한 자녀들을 아버지 손에 온전히 맡기고 나는 한발자국 물러서서 고즈넉하게 아버지와 자식들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련다.
나는 늘 외모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외모도 고운모양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인해 더 이상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내 모습은 하늘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으니까 분명히 나의 어디엔가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나를 보니 그야말로 나는 기가 막힌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신묘막측 하게 만들어진 해부학, 생리학적인 신체뿐만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생각의 세계도 만들어 주셨으니 나는 아버지의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인가! 뿐만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나 하나를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셀 수없이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자원들을 동원하여 정성들이고 공들여서 지금의 나를 만드셨으니 나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제일 나를 사랑하신 분은 나의 엄마시다. 친정아버지께서도 그러셨지만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연고로 엄마는 아버지 몫까지 나를 더욱 사랑하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 눈이 덮여있는 겨울의 새벽에 사람들의 내왕이 빈번치 않은 산속의 깨끗한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부처님께 산 기도를 오랫동안 하신 후에 나를 잉태 하셨다는 나의 엄마. 그래서인지 유난히 자식들에게 애착이 많으시다.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당신을 희생하며 살아오신 분. 아직도 팔십 줄에 들어선 엄마께 나는 습관적으로 기대면서 힘 든 일이 있으면 먼저 엄마를 찾는다. 평생 동안 내 치다꺼리를 하셨고 지금까지도 나의 큰 힘이고 나의 해결사이시다. 하지만 늙고 왜소해진 엄마의 모습은 내 가슴을 무너뜨려 버린다. 이제는 내가 안아줘야 할 애틋하고 가슴 뭉클한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른 나인 남편을 찾아서 나와 묶어 주셨다. 만나자마자 눈에 콩깍지가 들러 붙어버린 남편과 맞선을 본지 3개월 만에 결혼하게 된 이후에 우리는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을 하면서 함께 자라왔다. 이제는 남편과 나는 격전을 함께 치룬 전우처럼 서로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아껴주고 믿게 되었다. 항상 나의 모든 일을 전폭 지지해주고 지나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결과로 인해 나를 교만하게조차 만드는 나의 열렬한 팬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편이고 길들여져 잘 맞는 신발처럼 편하고 익숙하다. 오래 고아서 잘 우려낸 사골국물처럼 우리사이도 세월이 갈수록 진하고 구수해지는 것 같다.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고 자식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물로 주신 그 자식들로 인해 더욱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사는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가정 제도는 경이롭기 만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부부가 서로 아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 이제야 조금 수긍이 간다. 나도 남편을 아는 것처럼, 오히려 그것보다 더 친밀하게 아버지를 알고 싶다.
나를 특별하게 사랑해주는 나의 친가, 외가 그리고 시가의 친척들과 친구들, 은사님들, 교우님들 직장친구들, 때로는 나를 훈련시켜주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 내가 매일 다니는 길을 만든 사람들, 봄이 오면 내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하는 우리 집 앞의 목련을 심은 사람 등등…….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오직 나 하나를 위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곳곳에 배치해 두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원활할 때면 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순조로운 것 같다.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란 복음성가가 내 마음을 파고든다. 하지만 나는 받은 것의 몇 천분의 일도 베풀지 못하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완성인 나의 까칠한 품성이 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아프게 할 때가 많다. 하루는 아버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조금씩 앞으로 가다가도 다음날에는 세상에게 채어 감을 당하여 뒷걸음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계신 분, 언제나 부르고 싶고, 늘 그리운 그 분, 나의 주님, 예수님. 희미한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날의 가슴 벅찬 감격의 날을 바라보며 나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이젠 툭툭 털고 일어날 수가 있다. 그것은 내 곁에서 나의 사모하는 나의 주인 되시는 분이 나를 언제나 일으켜 세워주시는 연유이다. 그 분께서 내게 베푸셨던 기사를 기억하며 그 것이 내 평생 가는 길에 내 입의 노래가 되어 그 분을 찬양하리라.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 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 하리이다.” (시편 77:11,12)
당선소감
여고 때 심혈을 기울였던 작문이 교지에 실리지 않았다. 그 후로 글짓기는 나에게는 먼 나라의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아쉽고 그리웠지만 나의 손이 닿지 못하는 아득한 영역이라고 밀쳐두었다. 그런 내가 신인상 당선소감을 쓰려니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스쳐지나간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 보인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다가올 새로운 길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서툰 나의 글짓기 나라의 주인이시기도 한 그 분께서 내 향방과 발걸음을 인도해주실 것이다. 이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도 그 분께 내려놓고 무겁고 낡은 옷들도 모두 벗어버리고 새털처럼 훨훨 그 길을 찾아 가고 싶다.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지도편달해주시고 길잡이가 되어주신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주영희)
- 이전글미주재림문학 '신인상' 소설당선작 / Lee, Esther 10.10.21
- 다음글미주재림문학 '신인상 공모' 수필 당선작 / 이연희 10.10.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