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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미국의 모럴리즘 / 정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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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림문학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9.19 06:52 조회수 8,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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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모럴리즘  /  정영근


   당시에 무명의 인사이며 순수 무구한 사람 지미 카터는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모럴리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출범했다. 그러나 워낙 거센 폭풍 때문에 미쳐 써보지 못한 모럴리즘의 새 돛을 가만히 내려야만 했다. 당시의 미국인 탈 모럴리즘은 이데올로기적인 역풍에 맞선 셈이었다. 그러하다면 괴물 같은 그 모럴리즘이 네로의 안방 기구였거나 히틀러의 군사들이 휘둘렀던 날 센 칼날쯤이나 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도가니 속에 처박아두어 쓰지 못할 폐기 처분한 녹슨 연장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당시의 미국인은 하이네의 말처럼 “우리들이 모럴이라고 부르는 모럴의 규범은 단순한 궤변적 유희에 불과하다.” 라는 인식 같은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니이체의 말처럼 “모럴이란 하나의 요긴한 오류이다. 더욱 확실히 말하면 모럴을 장려하는 사람 가운데서 제일 위대하고 편견 없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모럴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거짓말인 것이다.” 라고 팽창한 인식론 때문이었을까?


   하기는 한창 매카니즘 시대의 옹색한 모럴은 하나의 오류요 유희로만 보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외눈박이로 전락한 모럴이 또 하나의 부인 못할 거짓 정도로 들쑤셔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의 미국인들은 개안 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정작 돛이 없는 모럴리즘의 항해가 어찌 될까 새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쩌면 탈 모럴리즘 그 미국은 지금 건재해 있다. 왜 안전하고 왜 그럴까? 만약에라도 그렇다면 탈 모럴리즘이라도 여전히 극성스럽게 외쳐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참 이상스럽다.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 같다. 사람이라는 제품이 애당초 창조주의 손을 거쳐 빚어질 때 모럴리즘의 모럴로의 형상화였다. 이것이 곧 바로 미국을 지탱해주는 미국인의 양심이다. 칸트의 말처럼 “모럴은 종교계에서 독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럴은 종교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잘 지켜보라! 만장 앞에서는 그래도 국부만은 가리는 것은 모럴로의 체감이며 나족이 뉴욕의 마나탄가 만은 옷을 입고 거니는 것은 모럴리즘의 모럴로의 쇠사슬(?)을 꺾지 못해서이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모럴 때문이다.


   그래서 꿈쩍 못할 자유방임의 태산과 세찬 역풍에도 그런 것들은 모럴리즘 모럴로의 카테고리 안에 잠적해 있을 뿐 염려는 서로 상반될 정도이다. 생각해 보면 도전은 아직 더 남아있는 것일까? 있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 부모를 죽이겠는가? 아내를 당장 간음 현장으로 몰아세우겠는가? 아니면 희대의 거짓말쟁이로 자녀를 기르겠는가? 이웃집 금고를 탈취하겠는가? 아니면 회사에서 보채도록 거짓증서 쓰겠는가? 또 아니면 남의 집에 들어앉아 내 것이라고 탈취하겠는가? 양심의 모럴로는 말한다. 아니다. 라고.


   우리는 모럴로의 탈을 썼고 모럴로는 양심의 고삐를 쥐고 있다. 그래서 자유로운 미국사회는 아직 안전하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다”(시 104:9)라고. 섬세한 바위에 푸른 이끼가 끼고 물불은 통나무에 그 이끼가 자라 꽃이 피는 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화의 섭리가 보인다. 왁자지껄하고 난리에 난리의 소문이 두려움으로 번질 만도 한 세상사가 그리 안정한 것은 그 고삐를 잡으신 창조주의 섭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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