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딸기차를 마시면서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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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짙은 잿빛이다. 사는 일이 유난히 서툴다고 느껴지는 아침. 음악을 연다. 바흐의 아리오소(Arioso). 첼로의 선율이 깊이 가라앉은 마음에까지 내려가 닿는다. 외로움은 아니다. 슬픔도 아니다. 그러한 감정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 틈에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아닌가. 삶의 원천적인 에너지가 빚어내는 서러움이 한기를 동반한다.
춥다. 지바고와 라라의 냄새가 난다. 더운 차를 마시고 싶다는 조급함이 정지된 공기를 휘젓는다. 세상을 구름처럼 떠도는 친구가 LA에 들러 가는 사이 건네준 독일산 딸기차를 고른다. 봉투를 열자마자 아득하게 퍼지는 감미로운 식물향. 물이 끓는 동안 봉투 겉면을 꼼꼼히 살핀다. 아크릴 질감의 봉투 사면엔 각종 꽃과 딸기들이 따뜻한 원색으로 무리지어 웃고 있다. 곳곳에 다양한 활자들이 빼곡하다. 모르는 언어는 예술작품 같다. 영어를 찾아내곤 모국어를 발견한 듯 기쁘다.
'Brombeere/Himbeere'라 이름 지어진 차. 내용물이 현란하다. 무궁화꽃잎, 사과, 장미열매껍질, 빌베리라 이름지어진 월귤나무열매, 약딱총나무열매라는 한국이름보다 영어이름이 더 예쁜 엘더베리, 블랙베리, 라스베리, 스트로베리.
한 티스푼을 컵에 넣고 끓는 물을 부은 다음 10분을 기다리라 한다. 맙소사. 두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마시는 차를 10분이나 기다리라니. 영화 장면이라면 삶과 죽음이 몇 번이고 넘나들겠다. 혼자 얘기할 수도 없고. 명상할 수도 없고. 음표 하나하나마다 주술을 걸어놓은 듯한 첼로의 무거운 현에 베인 가슴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시집 박남준을 편다. ‘봉두난발 같은 마음의 쑥대밭에 무너지는 한숨’을 쉬는 시인의 마음이 만져지는 듯하다. 마음속에 길이 하나 나 있고 그 속에 고여 있는 사람이 있다니, 그러니까 어쩌란 말인가. 아니다. 그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리움으로 고여 있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왜 괴로운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가 잘못이다. ‘한때 펄럭여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사는 일이 가위눌리는’ 시인의 청승이 내 것이 된다.
어제, 우리 글쟁이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니 빨리 죽어버려야 한다고, 친구 시인과 함께 맞장구를 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인이 선택한 시각이 전체인 줄 알고 속는 독자는 책임질 필요 없다고,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생명을 얻은 유기체이므로 독자 개개인의 몫이라고, 결론지었다. 문인이 한정된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 거짓일까. 순간의 허상 속에서 보석 같은 진실 하나 건져내고자하는 몸부림이 거짓일까. 문인은 눈에 고이는 풍경만 마음에 담는다. 느낌이 오는 것만 쓴다. 선별은 거짓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이 빠진 것은 문학이 아니다.
핏물처럼 붉게 우러난 차를 바라본다. 이렇게 화려한 차를 마실 자격이 내게 있을까. 남루한 일상에 어울리지 않는 차. 한모금의 맛과 향을 음미한다. 넘어오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는 뜨거운 슬픔 하나가 턱, 숨길을 가로막는다.
음악이 끝이 났다. 찻잔에 다시 물을 채운다. 여전히 붉다. 묽어질 때까지 마시리라. 결심 하나가 꼿꼿하게 머리를 든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묽고 가볍게 대하기. 마음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사는 일이 담담해질 것이다.
'문학세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 해외수필문학상 수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행복은 손해 볼 수 없잖아' '물빛 사랑이 좋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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