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정든 고향 떠나 이역만리 / 이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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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고향 떠나 이역만리 / 이재춘
할리우드 장로 병원에서 일하는 나는 삼십 여분을 달려 집사람이 일하는 병원에 온다. 임산부나 부인병 환자는 저녁 다섯 시가 지나야 그들의 업무가 끝남으로 그 후에야 예약을 하고 병원에 찾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집사람은 언제나 6시나 7시가 되어야 손을 털고 일을 끝내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쯤 되면 5번 프리웨이는 항상 커다란 주차장이 되게 마련이었고 한 시간여 달려 집에 오면 저녁은 8시나 9시쯤 되어야 먹게 되었다. 그러므로 생리적 현상으로 일어나는 저혈당인 나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항상 차안에서 집사람과 짜증스러운 말만 오고 가고 유쾌한 대화의 날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집사람은 명랑하고 애정 깊은 대화로 그 지루한 시간을 소화시키고 있었다.
프리웨이를 벗어나 곁길을 지나자마자 집사람은 조용하고 무게 있는 어조로 마치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무슨 유언이나 남기려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말인즉 "단골로 오는 산부인과 환자 한 분이 귀 병원에서 유방암 X-Ray 진찰을 받고 싶은데 자기 이름으로 예약을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예약을 해 주었는데 그분이 오늘따라 갑작스런 일로 오지 못한다고 하여 대신 유방암 X-Ray를 촬영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유방암에 걸려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 같은 소리였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말로 믿고 싶지도 않았다. 고향 떠나 이역만리 땅 설고 낯설고 풍습과 언어마저 통하지 않는 미국에 와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보려고 그토록 자존심을 발바닥에 깔아 문긴 채 온갖 육체적 고통과 쓰라린 가슴을 쓸어안으며 외로운 싸움으로 살아왔는데 원자탄 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암에 걸리다니? 아아 주님! 아직도 세 병아리들이 사시나무 가시 둥지에 몸을 웅크린 채 제자리도 못 잡았는데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다니? 지축을 가를듯한 폭풍전야에 검은 구름은 휘몰아쳐오고 하늘은 나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낼 듯 정말 미칠 것만 같게 했다.
중고차 혼다 어코드를 주차한 후 차안과 밖의 불을 다 끄고 집사람이 옆에 있는 것도 마다한 채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꿈의 나라 미국. 전쟁이 없고 자유와 꿈과 희망과 행복이 가득한 풍요로운 나라 미국. 자녀들이 활기차게 마음껏 뛰놀고 가슴 펴 웃을 일만 있을 것 같았던 미국. 그토록 우리는 행복의 꿈과 평화의 꿈 그리고 희망의 꿈을 가득 안고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이곳에 왔는데 나와 아이들은 미국에 간다고 행복의 꿈을 꾸듯 마음도 뛰고 가슴도 뛰었던 그런 나라. 이웃들도 모두가 부러워 "위하여!"를 외치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송별회를 열어 주었던 이 나라. 하나님은 어이해 이토록 큰 시험과 고통을 나에게 주는 것일까? 나는 오열을 토해내듯 엉엉 또 엉엉 울기 시작했다.
6.25때 B29의 폭격과 기관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죽음과 삶이 코앞에 놓여 있을 때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사랑하는 어머님과 여동생이 죽어 가마니에 둘둘 말아 얼은 땅을 헤치며 땅 속에 묻을 때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인민군에 쫓겨 흙벽 하나 사이에 둔 변소 뒤 칸에 숨어 참새 마냥 가슴 두근거리고 사시나무 떨듯 무릎이 부딪쳤을 때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인민군 패잔병들이 집에 들이 닥쳐 죽이려 할 때 공포로 가득한 눈동자 이리저리 굴려가며 의복장안에 들어가 숨이 막혀가는 때도 나는 이렇게 울지 않았다. 폭격으로 집이 무너져 온 몸을 덮치고 한참 후에 깨어나 옆에 있던 동생이 날아간 것을 안후에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어머님 돌아가신 후 일 일분 묽은 죽에 들에 나가 길가의 찔 짱구 뜯어 오 인분 죽을 만들 때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방공호에 쌀 한 톨 없고 콩알 반쪽 없는 6.25의 벼랑 끝 생활 속에서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영양부족으로 방공호 속에서 여동생이 죽어 누워있는데 눈과 입, 코와 귀에 쉬파리의 쉬가 노랗게 쓸어 있어 그것을 꼬챙이로 파내면서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민간인으로서 UN군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신문을 받고 철조망 안 그 넓은 들에서 신문지 한 장 덮지 못한 채 떨며 잘 때에도 나는 이렇게는 울어 본적이 없었다. 부모 잃고 실향도 슬픈데 12월의 칼바람 부는 매서운 추위 서울의 길가에서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서울위생병원, 밤마다 환자의 오줌 똥 받아내며 학교에 와 졸기만 한다고 교무실에 불려가 교감에게 꾸중을 듣던 때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파란 국군 복에 까만 물감 드린 교복을 입고 덕수궁 골목길을 비바람 맞으며 말없이 길을 걸을 때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갈듯한 겨울날 남산에 올라가 오늘 밤은 또 어디에 가서 잘까 하는 피나는 괴로움 속에서도 나는 오늘과 같이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이북에서 피난 온 외로운 고학생, 회사에서 퇴출당할 때에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등록금 없어 애타게 구걸할 때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미국에 이민 와 세 자녀의 아비로서 이민자의 집 없는 슬픔 속에서도 나는 이렇게는 울지 않았다. 뼈가 쪼개지듯 가슴 찢어지듯 목에 피가 맺히듯 나는 목 놓아 계속 울었다. 아내의 목숨이 더 이상 붙어 있느냐? 아니면 죽느냐? 의 갈림길 속에서 이 이민의 슬픔만이 자져다 주는 저주의 손길은 칠흑같이 속 타는 내 마음을 저 하늘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정 외면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이 쓰레기 같은 나의 인생을 그냥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들........ 목 놓아 울고 있는 나에게 집사람은 오히려 아무 말 없이 꼭 껴안고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울 때 마다 우는 만큼 강해지고 싶었다.
세 딸들은 숙제를 하고 있는 것인지? TV를 보고 있는 것인지? 집 밖은 그저 조용하고 캄캄하기만 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벨을 눌러 집안에 들어섰다. 침대에 누었으나 미국에 이민 온 꿈은 산산이 허공중에서 부서지고 손발은 차디차게 얼어 솜털은 무섭게 일기 시작했다. 말없이 침대에 누워 수 시간을 보낸 후 "고향 떠나 이역만리 미국에 와서 울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조용히 내 귓전에 울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나는 아내의 유방암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내가 일하는 할리우드 장로병원에 가 재진을 의뢰했다. 10분 20분이 왜 그리도 긴지? 입술은 자꾸 타 들어오고 애 간장은 말라 정말 미칠 것만 같은 심정으로 머리를 땅에 박고 숨을 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X-Ray 여기사가 빨간 카네이션 두 송이를 들고 나와 하나는 아내에게 하나는 나에게 안겨주며 "유방암이 틀림없습니다. 아주 초기에 발견하게 되었으니 희망을 갖고 용기를 잃지 마세요." 하고는 뒤 돌아섰다. 나는 가느다란 희망마저 꺾어진 채 또 한 번 눈앞이 캄캄해 졌다.
그 후 이병원에서 수술하기로 하고 날짜를 잡았다. 주치의 Dr. Su는 사무실로 찾아와 백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어느 부위를 어느 정도 수술해야 재발을 막을 것인지 설명해 주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열과 성의를 다했다. 이제 어찌하랴? 모든 것을 의사와 하나님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수술은 잘 되었고 아내는 삼일 후에 퇴원했다. 어머니가 아픈 중에도 맏딸은 병원에서, 둘째는 델타 항공사에서, 셋째는 가정교사로 수고하며 모두가 다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2년 만에 세 딸을 다 시집보내고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상황에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옛날, 나의 꿈은 어른이 되면 의사가 되어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여기저기 관광을 다니면서 보다 새로운 것 느끼고 배우며 그림도 그려보고 글도 마음껏 써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기도 했다. 이제 집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해 졌기에 오랜 꿈을 펼쳐 보기로 작심했다. 지난날, 미국의 이민 생활에서 역겨웠던 괴로움 다 접어버리고 이제는 연휴 때나 휴가 때가 되면 의례히 우리는 관광지도를 펴 갈 곳을 찾아 정하며 그 옛날 어릴 적 소풍가기 전날의 흥분된 마음 그대로 들떠 있기도 했다.
이제 따뜻한 두 손 마주 잡고 우리는 캘리포니아 주를 중심해 네바다, 아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와이오밍,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캔사스, 캔터키, 죠지아, 버지니아, 뉴욕, 와싱턴 D.C., 나이아가라, 캐나다, 멕시코, 일본, 중국, 영국, 불란서, 스위스, 이태리 심지어 북한까지 유명하다고 하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 다녔다. 이 얼마나 자유롭고 복된 나라에서의 축복과 행운의 연속 이였던가. 미국! 이제 미국이라 하면 이민의 슬픔은 깡그리 사라지고 제2의 조국이 되었다. 내 몸 백골이 진토 되어 이 땅에 묻을진대 이 땅에서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사랑과 충성을 다 하고 싶어만 진다.
이북에서 밤마다 숨어 예배드리고 소리 죽여 찬미 부르던 공포를 지나 이 얼마나 우리들의 자유로운 신앙을 함양할 수 있는 그런 나라인지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 감사할 뿐 그 고마움을 다 표현할 길 없다. 내 눈에 눈물 씻겨주신 그 이름 복된 예수! 날 구원해 주신 그 이름 복된 예수! 아아, 감사합니다. 나의 주여.
수필집; 그대로 행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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