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소망의 만남을 위하여 /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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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만남을 위하여 / 김형오
오랜지시(市)에서 엘토로쪽으로 넘어가는 18번 도로는 나지막한 야산과 호수 사이의 잡목이 잘 어우러져있다. 한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기에 언제나 정겹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일까. 나무와 나무들 사이사이로 물안개가 자욱해서 마치 신비스런 풍경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지금쯤 떠나온 고향의 야산에는 아직 녹지 않은 잔설이 고래 등처럼 흩듯 번듯 남아있으련만, 그것까지 아쉽다함은 이민자의 지나친 욕심이리라.
프리웨이 보다는 좀 두르는 것 같고 자동차의 속력을 내지는 못해도 나는 자주 이 길로 내왕하기를 좋아한다. 앞차의 꽁지만 쳐다보며 질주하지 않아도 좋고, 주변 경관 안에서 상념에 젖어보는 여유로움이 더욱 좋다. Bob 할아버지 집도 이 길로 다닌다. 집을 정리하고 시카고 아들네에게로 이사를 가니 몇 가지를 가져가란다.
부엌개조 공사를 시작으로 간간히 잔일들을 맡아온 인연이 어느새 10년이 더 되었나보다. Bob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후, 둘도 없는 가족 애견과 23년 동안 사셨다. 언제나 부엌구석엔 어지르진 개 밥그릇과 졸고 있는 늙은 개의 눈곱 낀 눈가에 누런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간혹 자기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 심산인지 Old dog can not training. 이라 중얼거리며 유난히 Training에 액센트를 주어 말하며 비대해진 개 목덜미를 건드려보지만 늙은 개는 꼼작 않고 멀뚱히 쳐다만 본다. 형언할 수 없는 연민이 가슴 안을 따갑게 후빈다.
웬일인지오늘은 Bob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카고는 여기보단 춥지요.” 라고 말했다. 이젠 나다니기도 힘들고 간혹 병원만 가면 되니까 괜찮을 거란다. 커피를 따라와 마시며 빛바랜 앨범에서 그의 아들사진과 독일에서 이민 온 선조사진 속에 오랜지농장이 보였다. 거기가 지금의 오랜지시(市)가 들어선 곳이라며 옛 기억을 더듬듯이 말해주었다.
시카고엔 언제 가느냐고 물었더니 정리가 되는대로 곧 갈 거란다. 또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하늘 아래서건 건강히 오래 사시길 바람 해본다. 만나고 헤어짐이 빈번한 일상에서 사뭇 애달픈 이별을 종종 겪는다.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진다는 이치를 우리는 잊어버린 듯 살아가고 있음이 새삼스럽게 읽힌다.
헤어짐이라면,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 이름을 가슴에 묻은 부모보다 더한 아픔이 있으랴마는 우리의 그런 고통을 아시는 생명의 창조자께서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소망도 주심에 여력을 추스른다. 그런 아픔 앞에 우리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가슴이 미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인내할 수 있음은 여간한 위안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신 소망의 그날까지 내 소중한 인연들에게 살가운 소임을 다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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