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을과 여인 / 이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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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보다 계절에 민감하다. 가을은 더 그러하다. 가을이 오기 훨씬 이전부터 가을 냄새를 맡게 된다. 나는 원래 냄새에 예민하다. 그러니 계절냄새는 그 냄새가 나기도 전에 미리 맡아버리는 것이다. 가을을 좋게 평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면 가을엔 내 마음이 비어지기 때문이다. 한물 가버린 나이 든 여자가 마음이 비면 어떻고, 쓸쓸한들 달라질게 있겠는가? 무작정 걷고 싶어지고 소리 지르고 싶어진다.
우리 가족은 초라한 3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저 밑으로 뵈는 여학교의 운동장에 석양이 지면 조용하고 쓸쓸한 운동장이 된다. 배신자를 미워하는 벤치의 여선생이 착각될 만큼 그토록 외로운 고요가 깃들게 된다. 아직 가을이 깊지 않은 한낮의 그곳은 나뭇잎이 매끄럽게 늘어져있고 어떤 나무는 잘 기른 승마 등처럼 기름져있다. 나는 이맘때부터 가을 병을 앓게 된다. 하늘을 사랑하고, 산을 사랑하고, 모두 떠나버린 강가를 사랑하고, 오직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저 거리에 미친 남자 하나가 쇠붙이로 식기를 두들기며 걷고 있다. 어느 행진곡 같기도 한데 그는 제물에 신바람이 나있다. 머리는 누더기처럼 돼있고 찌든 옷에 맨발이다. 사람들의 시선엔 관심이 없다. 오직 그에게는 율동만이 있다. 발과 손과 그리고 어깨가 알맞게 흔들거리고 있다.
가뜩이나 스산한 나에게 서글픔마저 안겨준다. 나는 미친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그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동심이 되어있고, 또 정직하고 솔직하다. 그들과 만나게 되면 흥미와 호기심이 범벅이 된다. 몇 살이며 얼마나 배웠는가? 그리고 왜 정신이상이 됐고 그의 배우자는 누구인가? 나는 몇 명의 정신이상자와 대화를 가졌었다.
육이오가 나고 몇 년이 지나자 거리엔 미친 사람들이 허다했다. 우리는 도시에서 십리나 떨어진 시골로 이사해서 살았었는데. 그 무렵 시골을 찾는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거의가 여자들이었다는 데에 지금까지 비애를 느끼고 있다. 유형무형으로 여자들만이 피해를 받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여자들은 인내했고 그 인내가 뭉치고 뭉쳐서 병들었고 또 미치게 되고...
우리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나는 그 무렵 외로웠다. 그 괴로움은 가을이면 더했는데 그 때가 되면 미친 여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 가을, 삼십이 채 안 돼 뵈는 미친 여인이 있었다. 구멍 뚫린 밀짚모자를 비스듬히 멋을 부려 쓰고 바위 위에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워 연신 코로 입으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극히 익숙해 보였다. 나는 가까이 가서 “여보세요.” 하고 조심성 있게 말을 걸어보았다. 그는 무엇인지 조그마한 물체를 두 손으로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멋쩍어진 나는 그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우뚝한 코에 금니를 하고 있었는데 정숙한 여자 같지는 않았다.
그 여자를 어찌 꼬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쨌거나 그 여자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우리 어머니를 보더니 담배를 뒤로 감추는 것이었다. 우린 상관없으니 피우라고 했다. 그는 왼손으로 담배를 가리고 피우기 시작했다. 실눈이 되어 한참 피우더니 춤을 추겠다고 했다. 적적했던 우리 모녀에겐 꽤나 재미있고 흥밋거리였는지 모른다. 곧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날씬한 몸매와 춤은 아주 잘 어울렸다. 춤이 몸에 배인 것처럼 몸놀림이 가볍고 멋지게 움직거렸다. 우리 모녀는 춤이 아주 훌륭하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멍석에다 벼를 널어놓았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무엇인가 까만 것을 골라먹고 있었다. 썩은 벼였다.
그 여자가 아니라도 가을이 오면 치마를 뒤집어쓰고 가을꽃을 꺾어 냄새를 맡으면서 먼 하늘을 끝없이 바라보기도 한다. 그들은 가을을 느끼고 우울해지고 심각해진다. 나도 그들과 같이 꽃을 꺾고 가을하늘을 본다. 가을엔 가식 같은 건 금물이다.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우는 것이다. 나는 가을이 오면 그 여인들이 찾아들던 그곳이 그립다. 그때는 나도 젊었고 어머니도 조금은 젊음이 엿보였다. 지금은 팔십 줄에 드신 어머니. 이 가을엔 그대로 동심이 되고 싶다.
미주 시조사 30주년 기념, 작품 공모에서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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