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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재림문학 출간을 축하 / 도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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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재림문학' 제3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도현석 (미주시조사 편집국장)

 

  며칠 전, 한국 시단의 원로요 고봉인 고은 시인의 시 낭송회에 참석하였다. 그분의 이름을 여러 번 들었고,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명된다는 말도 들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그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간혹 신문에서나 어떤 잡지에서 그의 시를 스쳐 읽었을 터이나, 그의 시가 내 가슴에 꽂힌 적은 없었다. 맨 앞자리에 앉은 덕분인지 취흥을 타는 시인의 절규와 속삭임을 듣노라니 그의 폭넓은 세계관이 밀려왔다. 온 세상을 평화의 도가니로 바꾸려는 그의 강인한 의지를 손끝으로 만졌다고 할까?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한 아내의 성화에 생일 선물 대신으로 따라가 준 시 낭송 회였지만, 마침 집에 와 있던 작은 아들까지 합세하여 가장 알찬 생일 선물을 준 것 같아 또한 흐뭇했다.

  시 낭송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불쑥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 사이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여쭈었다. 그의 시를 들으면서 나는 저런 것이 시라면 나도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그 어려운 질문을 재치 있게 받아 넘겼다. “시인은 이미 시인이 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시인이 아닌 사람은 앞으로 시인이 될 고통을 잉태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즉 모든 사람이 다 시인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시는 문학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시는 인간의 본성일 뿐이라고. 매우 철학적인 발언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처음 만난 시인은 어머니였다. 대수술을 받고 사경에서 살아나신 어머니는 깊은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다른 세상을 보셨다. 마음도, 눈도 열리며 온 세상이 너무,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하시던 어머니. 그 후, 국졸의 학력으로 가끔 맞춤법도 벗어나는 시를 쓰기 시작하셨다. 시는 글이 아니라 소리가 아니더냐. 앞마당에 있는 이슬에 젖은 봉숭아며, 아침마다 활짝 웃는 나팔꽃이며, 미소를 잃지 않는 과꽃이며 주변의 모든 아름다움이 어머니만의 언어로 다시 태어났다. 여러 권의 공책이 순식간에 시로 빼곡히 찼고, 어린 사 남매는 어머니의 시를 들으며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머니가 누구에게 시작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성이었다. 그것은 마음의 언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어느 날 어머니는 그 많은 공책을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너무 안타까웠으나 어머니를 말릴 수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어머니께 꼭 여쭐 말이 있다. “엄마, 그 시집을 왜 태우셨어요?” 나는 어머니의 시집을 유산으로 물려받지 못한 것이 한이다. 아직도 채송화와 과꽃과 봉숭아와 나팔꽃이 어울려 만들어진 시 동산에 들어가고 싶다. 한 대목이라고 기억하고 싶은데, 그 기억은 아스라이 사라졌다. 그러나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둘째 누이 속에 어머니의 시는 살아있어 누이는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때로는 나도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어쩌면 어머니의 시가 내 속 어느 깊은 곳에서 빠져 나오려고 꿈틀거리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시는 내 생애 속에서 재림문학의 단초였다.

  1992년 학위 논문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미 한국으로 돌아갔다. 외로운 기숙사에서의 한 달, 함께 지내던 방원이 겉장이 떨어진 소설을 보여주었다. 재림교회가 믿는 말세 사건의 구도를 정황으로 삼은 종교 소설이었는데, 재림신자인 주인공과 주변의 친구들이 펼치는 이야기로 몇 년간 학문적인 글만 대하던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푹 빠졌었다. 감동이 너무 커서 주제넘게도 한국에 돌아가서 할 일 중에 하나로 종교 소설을 쓰는 것을 포함시켰다. 어느새 18년이 흘렀지만 종교 소설은커녕, 종교 단편 하나 쓰지 못했다. 이제는 영어로 단편을 써보겠다고 독학 중이다. 대중이 많이 읽는 문학형식을 빌어 복음의 씨앗을 뿌려보자는 생각인데, 순수 문학가가 보면 당장 볼멘소리로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일침을 놓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시장에서는 비성경적 종말론 교리에 입각한 <레프트 비하인드>와 같은 종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이 날개 돛인 듯 팔리지 않는가? <다빈치코드> 따위의 성경의 종교를 암암리에 폄하하는 소설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이 되었으니….

  나는 미국에서 만나는 2, 3세의 젊은이들에게 글을 쓰라고 늘 권한다.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진리로 이끌라고, 아마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다들 시답지 않다는 반응이라 힘이 빠진다. 두 아들에게도 틈만 나면 글을 써보라고 한다. 남이 써놓은 글이나 읽으며 끌려가지 말고, 이끄는 사람이 되라면서 생뚱맞은 조언을 하고 있다. 남이 만든 것을 즐기지만 말고, 남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을 창작하는 것이 더 유리한 입장에 서는 일이라고 말한다.

  축사를 써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요상한 글이 나왔다. 상투적으로 하는 축하한다는 말, 더 좋은 글을 쓰라는 말보다는 내가 재림교인으로서 문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깊은 친근감을 유발할 것이라는 생각에, 간접적으로 재림 문학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나는 재림 교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재림교인 시인이 될 것이고, 재림교인 단편 소설가가 될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주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재림문학 3집에 기고한 모든 분들이 그런 생각과 자세를 갖고 글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재림문학 3집 출간을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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