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오렌지와 흑인 병사 / 김평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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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흑인 병사 / 김평웅
1953이었으니까 6∙25 직후여서 모두의 생활이 어려운 때였다. 피난 길 여러 곳을 전전하다 대구에 정착한 우리 다섯 식구는 손에 닿는 대로 엿장수며 음식장사를 해가며 누구나 겪는 생활고를 넘기고 있었다.
때마침 다니던 교회에서 초등학교를 열게 되어 나는 5학년, 여동생은 2학년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라야 학생수가 30명이 안 되는 조그마한 전형적 피난학교였다.
우리가 매주일 나가는 학교교회에는 미군들이 7∙8명 참석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열심이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사랑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흑인 병사가 교회에 사과와 오렌지를 가져오기 시작하면서 매주일 우리 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입술이 두툼한 흑인 병사는 런닝샤쓰와 캬키복 상의 사이에 빨간 사과와 노란 오렌지를 앞뒤로 잔뜩 집어넣어 마치 배불뚝이 산타클로스와 같은 모습으로 교회 마당에 들어서면 어린 학생들은 “와” 하면서 앞 다퉈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러면 유난히도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환한 미소로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 줄로 서게 했다. 그리고 사과나 오렌지 하나씩을 꺼내 나누어 주었다.
미국에 와서야 그 이름을 알게 된 빨간 큰 사과는 사과향이 좋은 워싱턴딜리셔스로 산도가 높은 대구 사과에 익숙해 있던 우리들의 입맛에는 별로였다. 그러나 오렌지는 특별했다. 향기도 생전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고 맛 또한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오렌지를 선호했다.
이 사실을 금세 눈치 챈 흑인 병사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오렌지를 주었고 큰 아이들에게는 사과를 나누어 주었다. 오렌지를 받아 든 동생과 함께 집에 오면서 우리는 무슨 귀중한 보물을 품고 오는 것처럼 가슴 설렘과 뿌듯함을 느꼈었다. 집에 와서 온 식구가 빙 둘러앉아 한 번씩 돌아가며 오렌지를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며 오랫동안 신기해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기고 한 조각씩 나누어 먹을 때면 우리는 잠시나마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진한 향내와 함께 새콤달콤한 맛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우리도 어딘지는 모르지만 먼 이국 낙원에서 이런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을 거란 꿈을 같이 꾸고 있었다.
우리 남매가 매 주 교회에 갈 때면 말은 안 했지만 서로의 마음으로는 오늘도 오렌지 하나를 받아오는 것이 원이었다. 또 매 주 그림같이 아름다운 드라마가 연출되곤 했었다.
한 1년 남짓 매주 계속되던 행사(?)가 어느 날부터 끊어지게 되었다. 그 친절하고 정이 넘치던 흑인 병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던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이 느낀 허전함이란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 다른 백인 병사가 똑 같이 사과와 오렌지를 가지고 교회 마당에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는 즐거워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난을 경험해서 배고픔을 아는 그 흑인 병사만큼 전쟁에 지쳐 굶주린 우리들을 이해하기는 힘들었으리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미군부대에서도 사과나 오렌지가 매일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과일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에게 부탁하여 하나하나 얻어 모았던 것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흑인 병사가 귀국하던 마지막 예배시간에 우리 모두 앞에 서서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글썽였는데 통역하는 사람의 말로는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 같이 만나자고 했다. 후일 천국 낙원에 가면 오렌지 하나 따서 그에게 쥐어주며 대구 피난학교에서 나눠주어 먹게 했던 오렌지 이야기를 하며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꼭 해야지… 그리고 나도 당신과 같이 사랑을 나누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했었다고….
지금은 미국에 와서 선키스트 오랜지의 원산지인 남가주에 살고 있다. 나는 오늘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그 선키스트 오렌지 하나를 손에 들고 향내를 맡을 때면 그 때 우리에게 꿈을 나눠주던 그 고마운 흑인 병사를 생각하게 된다.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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