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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수기} 선택 / 민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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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 / 민병효

                                                                

  누구에게나 인간 행로에 있어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세 번의 중대한 선택이 있었다. 첫 번째 선택은 1953년 대학 진학을 위해 시골에서 서울 유학을 마음먹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을 하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인기가 좋은 학과이라 비율이 매우 높았다. 2차에 경희대학 국문과에 입학되었다. 해방이후라 당시 국어과목이 인기가 높아서 교사로 취직이 좋은 편이었다.

   마침 하숙집이 고인이 되신 허석목사님(허형만목사 선친)의 댁이었다. 두 분이 계셔 조용하고, 바로 학교 앞이라 편리하였다. 목사님은 출장(문전부장)을 자주 가시고, 사모님께서  저를 정성껏 대접해 주셨다. 하숙칠 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숙생이 집 주인이 된 샘이었다. 알고 보니 따님은 목사님 사모님이 되셨고, 아들은 고등학생으로 삼육동 기숙사에 있었다.

   교회 출석을 권하였으나 토요일이라 수업도 있고 하여 몇 번 거절하였으나 너무나 사랑해 주시는 사모님의 뜻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에 5월 어느 토요일 수업을 포기하고 사모님 따라 학교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데 등교 시간과 비슷하여 학우들의 질문에 곤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친절하게 환영인사를 받고 안내 석에 앉아서(회기동 교회) 학교 강의 시간을 걱정하고 있는데, 한 가족이 나와서 가족 창(고 조경철목사, 조광수장로 선친)을 하는데 얼마나 보기가 좋고, 감동이 되었는지 나도 장래에 이와 같은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가족 창을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시골 대농하는 가정이라 1년 사시 농사와 과수재배로 겨울에도 쉴 새 없이 바빴던 생각뿐이라, 심지어 가족과 함께 나들이 간 기억도 없을뿐더러 가족이 함께 노래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환경이었다. 그래서 교회 가는 것이 좋았고, 찬미 부르고, 말씀 듣고, 모든 것이 저에게 새롭게 느껴져서 보고, 듣고 서로 교제하는 것이 매우 흥미가 있었다. 교회 첫발이 계속되어 토요일마다 교회에서 깨닫는 것이 학교 수업보다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결석으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였다. 과목 교수님을 찾아뵈옵고 나의 신앙을 알리고, 친구의 강의 노트를 받아 정리한 강의 내용을 보이면서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A학점 받을 것을 약속 받아 토요일 시험이면 다른 날짜를 받아 개별 시험을 보기까지 해당 교수님들의 문제들을 졸업하기까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해 주셨음을 감사드렸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사모님께서 교회 서적을 계속 주셔 고대사화로부터 시대의 소망, 각 시대의 대 쟁투까지 부지런히 읽다 보니 읽으면 읽을수록 의문과 문제들이 쌓이기 시작하자 교회를 선택한 것이 더욱 심각한 갈등이 홍수처럼 덮치게 되었다. 행복한 가정만 꿈꾸고, 취미와, 흥미로 시작한 교회 출석이, 나의 신앙의 결정이 교회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 선택은 본인의 관습과 유교의 전통적 관례와 토속신앙을 송두리째 버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바꿔야 하기에 심각한 문제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방학으로 귀가하여 명절이 되면 제사를 종가 집부터 시작하여 종일 각 가정에서 제사를 드린다. 그냥 앉아 있었더니 집안 어른 한 분이 저 녀석 서울 공부하러 가더니 왜 절을 안 하지, 저를 책망할 때 친 형님께서 저를 감싸기 위해 배가 좀 안 좋은가 봅니다. 이 말씀을 듣자 몇 집 둘리고 사랑채에 가서 누워 있었다.

   그 다음해 “54년 10월 27일 침례를 받고 귀가하여 또 제사에 참석하게 되어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기도하는 자세로 절하는 동안 있었더니, 저로 인하여 문중에 분쟁이 일어났다. 저는 절은 안하지만 기도를 드린다고 대답하고 문중 앞에서 교회 나간다는 것을 실토해 버렸다. 이때에 맏형님께서 저에게 강한 신뢰심을 주었다. 교회 나갈 것이면 끝까지 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말거라 하시면서 기도드리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셨다. 맏형님은 25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제사 지내시다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속에 들리는 것 같다.

   다시 등교하여 교회에 가니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 지기 시작하였다. 사모님께 더욱 감사하였고, 착실한 하숙생으로 사랑을 받기 위해 교회 가는 일에 더 열심히 순종하였다. “54년 10월에 회기동교회에서 20일 전도회를 하였는데 전도목사님이 고 오영섭목사님으로 힘 있는 말씀과 호소에 두 번째 선택과 결정에 용기와 힘이 되었다. 대학생 11명이 결심하여 10월 27일 중량천에서 침례를 받았다. 침례식에는 병원에 병문안 가서 처음 소개 받은 간호원이 나의 침례식에 참석하여 제일 큰 축하가 되었다.

   “54년 6월 어느 날 사모님과 위생병원에 병문안 같이 가서 아들을 방문하고 있는데 병실에 들어서는 간호원 한분이 머리며, 얼굴을 가리고, 백의천사의 차림이 아닌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나중 알고 보니 실습하다 바로 방문) 돌아오면서 사모님께서 딸을 소개하시면서 참 진실하고, 얌전하고, 좋은 점만 들면서 말씀하셨다. 시골에서 서울 공부하려온 하숙생이 주인 집 딸을 얻는 것은 여러 면으로 좋은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얼굴을 꼭 보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궁금하였다. 키는 적당하였고, 음성이 부드럽고, 얼굴에는 눈만 빛이 났다. 그 후 하숙집에서 만나 교제한 후 5년 만에 결혼하였다.

   두 번째 선택은 배우자를 결정하는데 첫째 조건이 되었다. 그간 57년의 긴 세월을 회고해 볼 때 배후자의 선택이 신앙과 믿음에 좌우명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전도회로 침례 받은 11명중 다 신앙에서 떠났으나 끝까지 남게 된 까닭은 배후자 선택에 있었음을 감사하였다.

   세 번째 선택은 진로의(직업) 선택이었다. 대학 3학년 초부터 경기도 장학사 몇 분과 군 교육장, 교장, 장학사 등 10여명이 함께 수학하였는데, 주 1일정도 등교하여 시험 때가 되면 나를 택하여 여관에서 합숙하면서 출제문제 중심으로 저가 복습교사로서 열심히 지도한 결과 AB학점을 취득하게 되었다. 4학년 때 큰 홍수로 인하여 휴학할 형편일 때 이분들이 나를 경기도(남한산성 곁) 광주 광지원 국민(초등)학교 보충 교사로 자리를 마련해 주어 숙직실에서 기거하면서 결근교사와 보충수업을 하면서 어려움 없이 졸업 할 수 있었다. 합숙하면서 복습한 10여명도 함께 졸업을 하였다.

   졸업을 앞두고 중학 교장 한 분이 서울 인근에 교사직을 마련하겠다는 진로의 길을 준비해 주었다. 꿈같은 행운의 희망이 전개되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교육장, 장학사, 교장, 교육감까지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당시 선친과 같은 항렬인 민관식 문교부장관의 배경도 좋고, 꿈이 현실화 되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배우자의 생각은 정 반대이었다. SDA 기관에서 사역하는 것이 결혼의 첫 째 조건이었다. 대학 수학 때 고 한기조목사님과 같은 과에서 4년간(사역 하시면서) 친숙하게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저를 만나 간절하게 권하기를 삼육신학교에 입학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준비된 직장과 꿈을 포기하고, 신학을 하면서 한국삼육고등학교 강사하면서, 좋은 조건하에 신학교를 마쳤다.

   사실은 졸업하면(대학교) 좋은 직장을 마련하고 결혼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이방인 저를 믿을 수가 없는 장인께서 신학을 하지 않으면 딸을 주지 않겠다는 반대로 어쩔 수 없이 2년 더 공부하기로 하고 삼육동에 입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결혼 대신 약혼식을 하고서 신학공부보다 삶의 길이 무엇인지 2년간 많은 수련을 싸왔다. 저는 삼육기관의 교사직을 원하였고, 열심히 하면 교장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목사 아닌 분이 교정직을 수행하는 학교가 있었기에 희망을 가졌다.

   교사로 부르면 어디든지 가서 열심히 노력하리라는 결심으로 2년을 참고 신학을 마치고(2월에 졸업, 3월 29일에 결혼) 4월에 부부와 함께 성육원내 성혜중학이 첫 사역이고, 내자는 간호사로 함께 근무를 시작한 것이 10년을 한 기관에서 같이 사역하였고, 여러 곳 삼육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가 은퇴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미국행 바람이 거세어 이민 왔더니 고생은 되었으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남은여생 기쁨과 즐거움으로 소망을 굳게 붙들고, 힘이 다하는 날까지 무슨 일이든지 봉사하면서 살 것이라 결심해 보았다.

   1992년 2월초 어느 날 영적 어머니이신 사모님(심정숙)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말씀인즉 저희 집에 오셔 며칠 유하여도 되겠느냐? 하시면서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아들(허형만목사)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셔 목회하시는 아들 집에 혼자 계시기에 답답한 심정도 있었겠지만 영적인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전에 간혹 LA 지역에 오시면 대접한 적은 있었지만 함께 유하지는 못하였다. 조용한 시골집이라, 방도 넉넉함을 보셨기에 오고 싶은 마음이 쌓였음을 헤아리지 못한 허물로 송구하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허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달 반을 함께 계셨다. 조석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 영적 어머니의 산고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행복한 가정으로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 영적 어머니와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렸다.

  간혹 혼자 계시면 들녘에 나가 나물을 뜯어 국이며, 반찬을 만들어 함께 맛있게 잡수셨다. 계시는 동안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심을 볼 때 한 영혼의 구원으로 자녀 손들이 믿음 안에서 큰일 하심을 생각하시면서 마음 흐뭇해하시고 행복해 하셨다. 아들집으로 가시고, 수개월 후 돌아가심(1992년 5월 10일)을 연락받았다. 육신의 어머니 못지않게 영적 어머니도 소중함을 함께 계시는 동안 실감하였다.   

  성경 말씀 룻1:16절에 룻이 시어머니의 길을 선택한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고, 여호수아 24:15절에 오늘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는 말씀 속에는 모든 진로의 삶의 보장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바른 선택의 길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 약속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시11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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