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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영원, 그 거부할 수 없는 매력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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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그 거부할 수 없는 매력 / 하정아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까. 지금껏 살아온 생애동안 칭찬받을 만한 일 한 가지만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일이다. 기적이다. 자의식이 강하고 의심이 많고 매사에 흐릿한 내가 이 세상 최고의 용기와 최고의 강한 확신을 요구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나 할까.

        살면서 가장 괴롭고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변심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사랑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속성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 나를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그 사람은 내일 혹은 내달 혹은 내년에도 똑같은 열정으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할까?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고 매달리는 그가 내일도 같은 심정일까? 알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사랑은 나약하기 그지없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사랑받을 만하니까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받을만한 형편이나 환경이 아니면 그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견고하다 생각했던 사랑은 많은 경우 터무니없이 사소한 일로 한순간에 망가지고 훼손당하고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나약한 인간의 사랑에 나의 전 존재를 의탁하고 기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서둘러 사랑에 빠지는 주변의 선남선녀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으로 오용된 감정에 매달려 울고 절망했다. 나는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홀연히 찾아올 때면 가만히 엎드려 그 사랑의 회호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은밀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 감정을 붙들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내려놓거나 멈추곤 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것도 이천년 전에, 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태초부터 계시고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가 동정녀에게 인간의 몸으로 나신 것을 보통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구약의 제사제도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연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산지사방 뿌려진 각종 동물들의 피와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그 내음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고대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기특한 것은 동물의 피를 흘려 죄 사함을 받는다는 메타포와 표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느 날, 히브리서를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9장 12-14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충격이었다. 감격이었다. 예수님이 창조주가 아니라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짐승의 피와 인간의 피는 그 가치가 확연히 다르다는 인식의 출발은 결국 나에게 올가미가 되었다. 나는 “하·물·며·”라는 단어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존재와 그의 의도가 가슴속에서 긍정이 되었다. 순식간에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어버렸다. 하물며, 하물며, 하물며 라는 단어 때문에.

        영원한 속죄라는 단어도 간과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영원한 선, 영원한 인자, 영원한 의, 영원한 나라.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원·”이 온통 성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있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에서 얻은 위로를 그대는 알까. 끝까지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말이다.

        일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 나를 지으신 분.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 영원한 분. 영원히 변치 않는 분. 나를 아는 이에게 나를 의탁하는 것이 얼마나 큰 평안인지 그대는 아는가.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나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어둠과 고통은 밝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세계로 향하는 터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영원을 알게 되었다. 도무지 사랑이라고는 들어설 공간이 없었던 황량한 내 마음속에 타인을 받아들이고 진정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십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계시니 그것으로 넉넉하고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아버지를 믿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믿습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지없이 황폐하고 그지없이 불행하고 그지없이 가련한 인생이 될 뻔 했습니다. 삶의 모든 굴욕과 비루함, 아버지 때문에 참을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고통과 설음, 아버지 때문에 견딜 수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왜냐하면 저는 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이기주의자인 저는 주님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저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망의 골짜기를 걷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저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도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에 힘입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문학세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 해외수필문학상 수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행복은 손해 볼 수 없잖아'  '물빛 사랑이 좋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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