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떤 친구 / 표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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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 / 표철수
1961년 9월 14일. 논산 훈련소 26연대 23중대 연병장에는 갓 입소한 훈련병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중대 연병장에 집결해 있었다. 잠시 후 훈련 교관인 듯한 중위계급장을 단 장교가 단에 올라 일장 연설을 하더니 "너희 중에 안식교 있으면 일어서라" 하고는 전체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식일 교회 혹은 안식일 교인은 무조건 '안식교'로 불렸던 것이다. 그때 저쪽 한 모퉁이에서 어떤 사람이 엉거주춤 일어서고 나 또한 엉거주춤 일어섰다. "너희 둘 뿐인가? 더 없어? 해산한 후 너희 둘은 중대 본부로 와"
왜 '안식교'를 지명하여 불러 오라고 했을까? 사실 '안식교'란 호칭은 썩 좋은 호칭은 아니다. '안식일 교회' 혹은 '안식일 교인' 이라고 해야 되는데 '안식교'라고 하면 조금은 비하하는 듯 한 인상을 풍긴다. 마치 일본사람들이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하듯이... 어쨌거나 당시 안식일교인 군인 선배들이 신앙적 양심에 의하여 집총거부와 안식일 준수를 이유로 토요일에 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들을 회유하고 협박하고 그래도 듣질 않으니깐 군 영창에 보내고 군법회의에 부쳐 몇 년씩 형을 살게 하였으므로 군 지휘관들로서는 자기부대에 말썽꾸러기인 안식일 교인이 있다는 게 골치 아픈 일이었고 자기부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므로 사전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이들을 가려내기 위함이었었다.
막사를 지정받고 해산한 후 중대본부로 갔더니 그 사람도 먼저와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눈은 와이셔츠 단추 구멍만 한데다가 머리를 빡빡 깎고 꾀죄죄한 훈련 군복을 입었으니 아무리 잘나고 잘 생긴 얼굴이라도 별 볼일 없기는 그나 내나 마찬가지였다. 살벌하고 아는 이 하나 없는 훈련소에서 같은 교인을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 친구와는 그렇게 만나게 되어 그 때부터 인연은 시작되었고 훈련시간 틈틈이 만나서 이야기하며 서로의 위로가 되고 일요일 훈련소 교회엘 가면 자기 서러움에 복받쳐 같이 울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며 6주의 훈련을 치러냈다. 당시 나는 미혼이었지만 이 친구는 결혼하고 6개월 만에 군대왔다며 '마누라가 보고 싶다'고 했다.
1961년이 어떤 해인가. '5,16군사 혁명'이라고 불리는 군부 독재의 시작이요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이 된 해 가 아니었던가. 집권 민주당 정권을 몰아내고 군사정부를 세우고 계엄을 선포한 뒤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군복무를 기피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군에 보내고 감옥에 보내던 살벌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 여파로 이 친구도 교보(교사 보직자)출신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입대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이참에 군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다. 6주의 훈련이 끝나고 이 친구는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다른 곳으로 가고 나는 원주의 통신부대로 배치를 받아 원주로 가게 되었다.
이 친구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나보다 했었다. 그러나 참 묘하게도 인연이 다시 이어지리라는 것을 그 때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 일이 있은 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79년 1월, 우리 가족이 미국에 이민을 와서 애나하임에 정착을 했고 우리보다 한 달 늦게 온 이 친구네도 이민을 와서 그것도 바로 이웃에 있는 아파트를 얻어 함께 미국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고 점점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알게 되고 흉허물 없는 사이로 발전하며 서서히 정을 쌓아 갔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미국이란 나라가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소질이나 전에 일하던 특기를 살려 그 같은 직종의 직장에 취직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한국에서 이 친구처럼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던 사람은 미국에선 설자리가 없는 게 당연했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몸으로 때우는 일 밖에 더 있었겠는가. 이 친구가 그러했다. 기술이라곤 아무것도 이곳에 와서 궁여지책으로 낮엔 아파트 청소, 밤에는 오피스 청소에 페인트 일 등을 하며 어렵게 힘들게 지내더니 언제부터인지 우체국 채용 시험을 보고 우체국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여 전보다 나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병상련의 정으로 우리는 정을 쌓아갔다.
이 친구는 못 하나도 제대로 박을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친구가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소설을 쓴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국어교사의 전력을 살렸는지 미주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문예작품 공모에 소설을 올려 당선이 되었다. 그 후로도 등단작가 답께 꾸준히 글을 쓰더니 몇 년 전엔 단편소설집을 내고 문인으로서의 입지를 튼튼히 다져 갔다. 내 나름의 생각이지만, 소설은 창조라고 말하고 싶다.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서 그 인물에 성격을 부여하여 사랑을 하게 하기도 실연을 하게 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며 독자들의 가슴을 졸이고 눈물을 흘리게도 하는 엄청난 재주꾼이니 말이다. '여보게 친구, 이젠 단편만 쓰지 말고 장편도 써보게나. 혹시 누가 아나 그 장편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더 나아가 노벨 문학상감이 될는지....'
그러면서 우리의 관계도 점점 더 깊어지고 이젠 속내를 다 펴 보일만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갔다. 교인은 백 날 아니 백 년을 가도 교인일 뿐 친구는 될 수 없다. 안식일에 안 보인다고 걱정하고 궁금하다고 전화로 안부를 물어도 교인은 교인일 뿐 친구는 아니다. 교인이라는 사람들은 잘 나가다가도 조금만 맘에 안 들면 당장 본색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린다. 감추어야 할 것도 많고 체면치레 할 일도 많다. 그러나 이 친구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 때고 스스럼없이 오고 갈수 있는 친구가 이 친구다.
이 친구와는 함께 여행도 많이 했다. 여행을 할 때면 모든 계획은 내가 세우고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만 이 친구는 그저 다 내 말에 따라준다. 크루즈, 낚시, 모뉴멘트 밸리, 아치스 국립공원, 라스베가스 등 웬만한 곳엔 거의 함께 여행을 했다. 여행을 함께 하면 더 친밀해지고 스스럼이 없어지고 신뢰도 깊어진다. 몇 년 전 멕시코로 크루즈 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배가 어느 도시에 정박하자 시내 관광을 하고 쇼핑을 하던 중 길가에서 어느 멬시칸 여인이 코코넛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마냐고 물으니 1달러란다. 둘이 하나씩 사서 칼로 과일의 윗부분을 깎고 빨대를 꽂아 그 안의 물을 빨아 먹더니 하는 말, "꼭 말 오줌 같네."
이래저래 계속 정을 쌓아간다. 좋은 친구란 급조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통하여 갈고 닦이면서 미운 정 고운 정들이 쌓이고 쌓이며 서서히 만들어 지는 게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친구는 내세울 건 없지만 꽤 쓸 만한 친구인 것 같다. 왜냐 하면 50여년을 함께한 묵은 장맛(?)이 되었으니깐......
조금 전 이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니 뭐 하노? 소금 온천 안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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