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수기} 형님을 만나다 / 고득선 > 글동네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글동네

{탈북 수기} 형님을 만나다 / 고득선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형님을 만나다 / 고득선

                                          

   어린 시절 나는 시골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화합상동에 살았다. 부모님을 따라 정든 고향을 버리고 하송관리로 이사하여 다시 친구를 만나 마음껏 놀면서 자라나게 되었다. 일제말엽이라 부친께서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면서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당시 왜정치하 식민지에서 교육을 거부한 사상인 것 같았다. 어린 친구들이 모이면 나무로 총(일본 총과 같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 제일 신나는 놀이다.

   때는 1940년 전후 일제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탄압으로 신앙인들은 은둔생활하면서 시골 산속에서 몰래 찬미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상황이라 교회에서 정식 집회를 가질 수 없어 이집 저집 숨어서 밤이면 불빛이 새지 않게 포장을 치고, 낮 예배 때도 소리가 바깥으로 새지 않게 이불을 치고 예배드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린 마음이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일본인들이 증오스러웠다.

   교회 해산과 핍박 때 하송관리 SDA 교회는 산언덕에 있었다. 어린 때지만 초가집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가정은 형님 두 분과 누님이 계셨는데 맏형님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을 보았다. 시골 대농하는 집이라 언제나 농사일에 바빴지만 형님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드릴 때는, 전혀 일은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술을 잡수시고 형님이 교회 가는 것을 적극 반대하시곤 하였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계속 교회 출석을 했다. 한번은 술에 취하신 아버지께서 돌로 대려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으나 형님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계속된 핍박에 어린 저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에 무서워 떨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때만 해도 교회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여 구경삼아 엿보기 시작했다. 무릎 꿇고, 눈을 감고 입으로 중얼중얼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나중 알고 보니 기도드리는 것이었다.

   형님(고자선)에게는 아버지의 핍박뿐 아니라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신앙의 타격이 매우 심하였음을 우리 집에서 예배드릴 때 더욱 깨달았다. 우리 집 안방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담요를 치고, 신도 방안으로 숨기고, 관솔로 불을 켜고, 성경도 큰소리로 못 읽고, 찬미도 나직하게 밖으로 새지 않게 예배드리는 광경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감동이 되어 밖에서 감시도하면서 함께 예배드리곤 했다. 1943년 12월 교회가 정식으로 해산명령이 선포(일본 식민지로 강제 해산)되자 평강에서 집회하시던 김성달장로님이 도시를 떠나 하송관리 시골 남미봉에 집을 마련하고 가정집회소(평강에서 같이 온 신자들)를 시작하여 인도할 때 하송관 리 마을에서 집회하시던 민태호장로님이 인도하던 집회가 폐쇄되자 읍에서 시골로 옮긴 신도들(장정락, 장성락, 계용즙장로등, 고자선, 장철제, 최명기, 최석복, 최석환, 김이천, 이용준집사 등) 30여명은 더 시골로 전전하면서 예배드렸으나 모든 집회소는 다 폐쇄되었다. 결국 깊은 산속 움막에 숨어들어가 예배드리며 신앙을 고수한다고 했다.

   1944년 말 당시 내 나이 13살이었음으로 일본인의 탄압과 신앙말살을 위한 핍박이 눈에 생생이 그려진다. 심지어 평강집회소(김성달장님 가정)에서는 안식일 예배드리다가 발각되어 신자 8명이 한 줄로 포박당하여 각 가정으로 돌면서 성경 찬미를 모두 몰수하여 김웅호 학생에게 배낭을 매우고(페교당하고 가정에 돌아온 김웅호) 지서로 연행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인력부족으로 일정의 징병제가 실시되어 하송관리에서도 가가호호 연령에 찬 청년들을 징집하였을 때 두 형님도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러나 맏형님(고자선)은 김성달장로님과 함께 김화 산판에 들어가셨다. 당시 산판에서 철목제작 회사(신태식장로 주선)에 입사되면 징집면제와 식량배급도 받았으나 식량이 부족하고, 너무 힘이 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이 여의치 않아 다시 봉화군 태백산에 들어가서 해방될 때까지 형님은 거기 계셨다. 작은 형님도 집에서 피신하였으므로 두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가 경찰서에 연행되어 형님의 행방을 문초받으면서 체벌을 당했으나 모르기도 하지만, 말할 수도 없었다.  식구들 모두를 불러 문초까지 하여도 해답이 없자 수십 차례 아버지를 불러 심한 고통과 매질로 심문했지만 끝까지 굴하지 아니하셨다. 형님 두 분을 찾기 위해 계속 호출하여 태장으로 심문하였지만 아들을 위한 사랑이 무엇인지 당하기만 하셨다.

   나중에는 작은 형님이 형님을 찾아 태백산까지 가서 아버지의 고통을 알리고 같이 징집에 응하자고 했다 한다. 이런 와중에 가정이 파탄되고, 농사가 엉망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늦게 학교에 들어간 나도 두 형님 대신 집일을 맡게 되어 아버지와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장 소, 돼지를 돌보며 풀을 베어야 했고, 땔 나무까지 해야 밥을 지을 수 있었다. 학교 가는 일은 둘째가 되고, 말하자면 작은 머슴이 되어 버린 셈이다.

   아버지는 너무 지쳐 버렸고 술만 잡수시고 주무시는 일이 일과였다. 나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어머니와 함께 울며 지낸 날이 많았다. 형님의 기도를 들어 주셨는지 막다른 지경에 다다른 우리 가정에도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기쁨은 무엇보다 우리 가정이 살아난 기쁨이고, 내가 살게 된 기쁨이요. 아버지는 두 아들을 마음 놓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지긋지긋했던 징집도 해결되었고, 가정이 회복된 것은 우리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었다. 산에 숨었던 청년들, 움막에서 동굴에서 믿음을 고수하였던 신앙인들, 무엇보다 독립을 위해 투신한 구국인사 모두가 해방되어 한 가정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마음껏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6년간 나라 잃은 슬픔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데 해방은 되었지만 삼팔선으로 인한 나라의 원한이 쌓이게 되었으니. 38선 이북에는 소련이 주둔하였고,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왕래가 불허되었다. 그러나 감시가 심하지 않아 그 때는 몰래 월남, 월북도 할 수 있었다.

   해방으로 일본에 넘어갔던 모든 교회 재산(모든 기관, 교회 건물과 땅, 가옥 기타)을 1943년 이전의 현상으로 회복되었다. 교회 조직과 재건사업을 위해 1945년 10월 18일 신도대회를 결의하고, 이북 지리에 밝은 김성달장로님이 이북신도들을 위해 직접 신도대회 소식을 각 지역에 전하도록 하였고, 하송관리에 계신 고자선장로를 모시고 10월12일 경 월남하여 신도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 이북 신도들이 100여명 참석하였다. 이분들 대부분은 그대로 남한에 머물렀다. 신도대회가 끝나자 돌아온 분들은 다행히 귀가했지만, 남한에 잠시 머물었던 분들과는 사상대립과 북한의 적화공세로 38선의 방비는 더 강화되었다.

   신도대회 참석으로 떠난 형님은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갓 결혼하신 형수님의 마음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안타까움에 하루가 한 달 같은 삶의 불안이 말할 수 없었다. 형님의 무소식은 날이 갈수록 불안하였다. 혹시 귀가하시다가 어떻게 되기라도, 형수님의 불안과 초조하신 심정을 가족들은 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어린 나를 동반시켜 탈북을 결행하라는 것이었다.

  38선의 경비며, 남한의 사정, 혹시 탈북을 계획한 동반자가 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5명 가령의 동행을 찾게 되었고, 돈을 받고, 안내하는 분도 알게 되어 돈을 건네고, 떠날 날짜를 약속 받았다.

  이 때 나이가 15세(1947년 7월)이니 아직 군 입영 나이가 안 된 미숙 소년이었다. 아마 김일성정권은 남한 적화통일을 이때부터 계획한 것이 틀림없지 싶다. 군인을 계속 보강했으며 6,25 때는 18세도 총을 쥐게 했으니까,

  어느 하루 큰 형수님을 모시고, 이남에 계시는 형님에게 가야하는 날이 닦아왔다. 말로만 들은 서울이 어디에 붙은 지도 모르는 나에게 엄청난 책임이 짊어져진 것이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을 떠나 본적 없는 시골 아이인지라 그 때는 부모님을 떠나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처음엔 적극 반대했다. 아버님은 형수님만 생각했지 아들 잃는 생각은 없으신지?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때는 7월이라 간단한 옷과 준비해 주신 돈을 잘 챙겨 일행과 함께 어느 장소에 모여 설명을 듣고, 형수님을 모신 소년이 어른들 틈에 끼어 형수님의 손을 잡고 강변에 이르자 보안대에 포위 연행되어 인민보안서(경찰서)로 끌려갔다. 취조실에 대기 중인데 옆방에서 매 맞는 소리와 신음소리에 시골 소년은 두려움과 겁에 질린 채 취조실에 들어갔다. 거처와 신분을 묻고서 어린 녀석이 어디를 가느냐? 옆에 분은 누구냐? 어머니 같지는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 남한에 형님이 계시는데 형수님을 형님께 모셔드리고자 했다고. 형수님을 두시고, 잠간 다녀오신다던 형님이 신도대회 참석 후 돌아오지 않아 부모님은 며느리가 너무 애초로워 병까지 났습니다.

   아저씨 가게 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위협하고 공민증을 빼앗고, 기다리라 하더니 한분과 이야기를 한 뒤 남한으로 가면 살 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공민증을 돌려주면서 이번만은 용서해 줄 터이니 곧장 가야한다고 했다. 어린 시골 소년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동정이 갔는지, 하나님의 도우심인지, 하여간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었다. 다시 형수님과 형님 만나기를 결심하고 산기슭에 숨어 해지기를 기다리다가 내무 원들의 교대와 저녁식사인지 조용한 틈을 보아 다시 강변으로 갔다. 일행은 없어지고 몇 분이 도강을 하는데 다행이 초생이라 내무원의 눈을 피하는데 좋은 때고, 춥지 않고, 물이 얕아서 다행이었다. 3,8선을 앞에 두고 이제 붙잡히게 되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형수님 제 손을 꼭 잡고 같이 뛰어야 합니다.

  사는 길은 죽을힘을 다해 사선을 넘어야 하기에 나뭇가지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다치기까지 하면서 간신히 3,8선을 넘었다. 정말 사생결단이었다. 이제는 살았구나, 안도의 숨을 내 쉬면서 지친 몸을 땅에 맡기니 천근만근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동이 트기 시작하여 주린 배를 참고 마을로 내려와 구걸로 배를 채우고 동두천역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미군들이 우리를 데리고 가서 온몸에 DDT 가루약을 뿌려주고 소독한 후 기차를 태웠다. 기차를 타기 전에 몸을 검색하면서 돈과 이상한 소지품들을 압수하는 것을 보고 피해 역 주위 재목 쌓은 옆에 땅을 파고 묻었다가 기차 탈 무렵 다시 가서 찾으니 마음이 급해 찾지 못하고 애쓰다 간신히 찾아 기차를 타고 말로만 듣던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물어 물어서 회기동 안식일교회를 찾았다.

   집사님의 안내로 형님이 사시는 집에까지 갔다. 마침 일을 마치고 집에 계셔 꿈과 같은 상봉의 장면이 이뤄졌다. 상상도 못한 만남은 형님의 일생에 제일 큰 선물이요, 기쁨이었다, 물론 저에게도 부모님을 만난 기쁨 이상으로 기뻤다. 막내아우의 자랑스러운 월남, 나의 뜻을 이룬 장한 성취감으로 형님과 더불어 우애의 정을 든든하게 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소식과 식구들의 안부를 이야기 드리고, 이산된 가족들의 걱정과 나의 삶도 걱정했다. 때는 해방 직후라 교회기관들을 다시 찾아 복구와 재건에 손이 모자라 형님이 빨리 돌아오지 못한 원인도 있지만 다소의 생활비라도 마련할 속셈으로 일한 것이 지체의 사연이었다. 점점 3,8선이 감시가 심하다는 소식에 때를 기다렸다 하시면서 북에 계시는 가족과 처를 위해 밤낮 쉼 없이 기도하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하니 무사히 탈복한 것이 저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새삼 깨달았다.

  1948년 9월 15일 김창호학생과 같이 삼육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너나없이 가난했고, 먹고 살기도 궁했다, 그러나 형님이 서울위생병원에서 일하시는 덕분에 감독이 형님 일(목수, 집수리 등)을 도와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또한 병원의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 대학까지 마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다.

  뿐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무사히 월남시켜 주셨고, 한 믿음 안에서 서로 돕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으니 그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모든 형제 식구들 모두를 미국에 와서 함께 살게 해주셨음에 다시 한 번 한도 끝도 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