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 마음의 면도칼 / 하정아 > 글동네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글동네

{수필} 내 마음의 면도칼 / 하정아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내 마음의 면도칼 / 하정아

 

 

   면도칼을 삼켜버린 한 여자 죄수의 장 검사 팀에 투입되었다. 위장내과의의 지시에 따라 환자에게 신경 안정제와 진통제를 투약했다. 환자의 생체리듬은 안정적이었다. 실내 불이 꺼지자 컴퓨터 스크린이 더욱 환하게 밝아왔다. 환자의 식도를 통해 진입한 내시경이 보여주는 내부에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밝은 분홍빛을 띤 위는 건강하고 깨끗하였다. 상하거나 변색된 곳이 없었다. 혹이나 궤양이나 염증을 예상했던가. 버짐과 부스럼과 자해의 흔적으로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피부만큼이나 소화기관 또한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속단했었다. 미안했다.


   면도칼은 좁은 위문 옆 횡으로 누운 위장 벽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그곳까지 지나오는 동안 어느 한군데도 면도칼에 베어 상처를 입은 흔적이 없었다. 의사가 내시경 끝에 바구니를 매달아 여러 번의 시도 후 면도칼을 빼내자 출혈이 시작되었다. 레이저 지혈 후 시술은 끝이 났다. 엑스레이를 통해 면도칼의 위치를 추적하고 그것을 꺼내기까지 불과 두어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젊은 나이에 자유를 저당 잡히고 사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왜 면도칼을 삼켰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 단순히 화가 나서 면도칼을 삼켜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팔을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아프고 괴로운 세월을 보냈음이 틀림없다. 그녀의 죄가 어떤 것이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낯설지 않으리라. 누구에게나 그 가능성이 열려있기에 비난은 단편적이다. 그녀는 피해자일 수 있다. 나는 그녀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다.


   면도칼을 삼키다니, 수술방 동료들은 끔찍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그냥 받아들여졌다. 목숨 걸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목숨 건 사랑 한번 해본 적 없는 나는, 목숨 걸고 세상에 도전해보겠다 나선 적 한번 없는 나는, 오히려 부끄럽고 씁쓸하였다. 그녀의 삶에 대한 독한 열정과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녀의 병은 순진해서 치료도 쉬웠다. 나처럼 복잡한 인간은 타인이 도와주고 싶어도 구제불능이다.


   내속에도 면도칼이 있다. 나의 비애는 내 마음에 면도칼이 있다고, 그러니까 아프다고, 소리칠 수 없다는데 있다. 나의 마음의 혈관 곳곳에 박힌 면도칼은 어떤 최첨단 엑스레이로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이리저리 피톨을 따라 돌다가 시시때때로 아픔을 준다. 행방이 묘연한 면도칼을 찾자고 온몸을 뒤질 수도 없는 일이다. 총 6만 마일이나 되는 혈관을 따라 각종 장기를 돌면서 셀 수 없이 많은 면도칼을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의사는 포기해버릴 것이다. 면도칼을 찾는다해도 문제다. 일시에 제거하려들면 과다출혈을 일으킬 것이다.


   눈을 감는다. 아, 면도칼이 보인다. 춥고 쓸쓸했던 유년. 미망(迷妄)에 흔들리며 괴로웠던 청년시절. 이인삼각의 불협화음이 빚어내는 중년의 절망. 일생동안 풀 수 없는 꿈과 현실의 괴리. 세월의 갈피마다 수없이 삼켜버린 면도칼들. 그 파편들.


   이제 그만 삼켜야지. 이제부터는 거두며 살아야지. 마음의 혈관 속에 모세혈관까지 통과할 수 있는 내시경을 투입하고 구석구석 면도칼의 파편들을 찾고 싶다. 내시경 끝에 달린 거름망에 그 시체들을 수습하여 장사지내주고 싶다.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만성적인 아픔에서 벗어나 순수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문학세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 해외수필문학상 수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행복은 손해 볼 수 없잖아'  '물빛 사랑이 좋다' 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