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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회추천 수필} 거위의 꿈 / 김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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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위의 꿈김명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좀 나오지.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저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계속 선수 생활을 해야 할까? 이제 그만 퇴장해도 되지 싶었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간혹 펼쳐보는 일간지의 스포츠 면에서 약방의 감초 격으로 나오는 박찬호의 현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었다. 어쩌다 안타를 쳤다 하고, 또 어쩌다 홈런을 때렸다고 하고. 또 언제는 부상당해 등판이 어렵다고 하고, 어떤 경기에서는 1점도 올리지 못 했다고 하고.... 예전에는 잘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갈수록 못한다는 쪽으로 가는 박찬호. 운동에 문외한인 내가 볼 때 박찬호는 그만 은퇴하는 편이 나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마다 머리기사로 등장한 박찬호의 이야기를 대하며 나의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 깨달았다.

  지난 9월 12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소속 박찬호가 강호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개인 통산 123승째를 챙겼단다. 일본의 은퇴한 야구 선수 노모 히데오가 보유한 동양인 최다승 기록과 같은 기록이라며 신문마다 온통 박찬호 이야기로 떠들썩하였다. 1994년 LA의 다저스에 입단하여 꼭 14년 5개월 6일 만에 얻은 금자탑이라고. 5년간 무려 7000만 달러의 몸값을 받고 텍사스 레이저스로 건너가며 대박을 터뜨렸으나, 그 후 계속되는 부상과 부진의 늪에 빠져 ‘먹튀’라는 비아냥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노모 선수의 기록을 깨기 위해 오뚝이처럼 일어난 박찬호는 끝내 자신의 야구인생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그 옛날,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입성 소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 후, 한국 스포츠의 세계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박세리, 월드컵 4강, 박지성, 박주영 선수들의 세계무대 진출에도 커다란 몫을 감당하지 않았겠는가.

  자신의 꿈을 이룬 것뿐만 아니라 후배 선수들의 꿈을 이루는 견인차 역할을 하며, 더 나아가 한국 민족의 기개를 한껏 올려준 ‘코리안 특급’ 박찬호!


  나에게도 그러한 꿈이 있었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청운의 뜻을 품고 남편 따라 왔던 미국 유학생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공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뒤늦게나마 학생으로 한 울타리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분의 수필집 출판기념 모임이 있었다. 유학 생활 1년 만에 어렵사리 구입한 고물 자동차를 끌고 대륙 횡단을 하려던 참이라 그 출판 기념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 분이 너무도 부러웠다.

  ‘아, 나는 언제나 저런 모임을 가져보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스스로도 너무 놀라, ‘뜬금없이 내가 무슨 출판기념회?’라고 도리질을 하며 애써 생각을 지웠었다.

  세월이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 때의 그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아직도 때 없이 부러운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한다. 피아노를 전공한 만큼 누가 음악회를 한다는 것을 부러워해야 마땅할 사람이 그런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누군가가 출판기념 모임을 갖는다는 것을 그리도 부러워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 

  고교 시절, 단지 국어나 영어, 작문, 한문 시간은 재미있게 보낸 기억이 있고, 어쩌다가 한두 번 작문 시간에 내 글이 뽑히기도 했던 것. 그 뿐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를 보내며,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교양지’라는 슬로건에 끌려 샘터라는 자그마한 잡지는 매 달 사서 읽었다. 정기구독 신청을 하면 간단한 일이었으나, 매달 서점에 가서 구입하는 것이 이를테면 나에게는 성스럽기까지 한 나만의 의무요 또한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내 소중한 책을 마냥 집에 앉아 받기보다는 내가 직접 가서 사 들고 와야 더 값어치가 있는 듯 생각되었던 것이다. 어쩜, 사람들은 그리도 맛깔나게 글을 잘 쓰는지, 항상 감탄하며 읽고 또 읽고.... 당시 최인호 선생의 연재소설 ‘가족’에 등장하는 다혜, 도단이가 자라가며 나 또한 정서가 키워졌는지 모를 일이다.

  또 화가 천경자 여사의 <한>이라는 책은 그냥 제목이 좋아서 한 숨에 읽으며, 내 앞에 펼쳐지는 온통 형형색색의 색깔에 흠뻑 취하기도 했다. ‘이 분은 화가라더니 마치 그림 그리듯 글을 쓰시네.’ 그 책을 펼치면 온통 화려한 색상의 풍경이며 꽃, 나비 등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것이, 한 편의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되어 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이제는 희미해졌지만, 아마 ‘점례’라는 여자 애가 자주 등장하곤 했었는데.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나갈 무렵, 이해인 수녀가 어머니 생신을 기념하며 집안 문집을 엮은 책이 출판되었다. 그 책을 읽으며 예의 그 병이 도졌다.

  ‘나는 언제나 이런 책을 내 보나....’ 당시 코흘리개 초등학생인 두 아들에게 우리도 이런 문집을 내자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 댔다. 마냥 의욕만 앞서는 못난 엄마, 못난 아내는 식구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환영 받지 못한 채 속절없이 세월만 흘렀다.

  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옛날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왜 그리도 출판기념회가 부러웠는지 말이다. 몇 해 전 성탄절 무렵, 모처럼 친정어머니를 비롯하여 출가한 3남매 슬하의 자손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의 이야기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오라버니로부터 전혀 새로운 사실을 들었다.

  50 생신도 못 채우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책을 낼 것이라며 당신의 행적을 기록한 두툼한 원고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셨다고 한다. 이북이 고향으로 1·4 후퇴 당시 월남하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물설고 낯 설은 이남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겪으셨을 무수한 사연들을 기록한 원고가 있었다고! 그런데 살기에 급급하여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하는 통에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더니만, 결국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사라져 버렸다며 오라버니는 안타까워했다.

  ‘그랬구나. 아버지의 피가 내 속에서 흐르고 있었어!’ 그 동안의 의문이 스르르 풀리며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왜 50 나이가 되도록 그것도 몰랐을까?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글을 쓸 생각을 했을 텐데. 지나간 세월이 아쉬웠다. 아버지의 못 다한 꿈을 이 부족한 딸이 이루어야 할 텐데.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아버지의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부딪쳐 보자. 벌써 50이 아니라 이제 50밖에 안 됐는데 앞으로 10년 후, 아니 죽을 때까지라도 한 번 해 보는 거야.


  123승을 챙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찬호는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플로리다 전에 구원 등판하여 아시아 출신 투수 역대 최다승인 124승을 기록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불혹을 바라보는 박찬호의 앞길이 어떻게 펼쳐질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하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나아가는 그에게 하늘도 무심할 수 없으리니....

  모처럼 집에 온 아들에게 박찬호의 기사를 읽어주니 아들은 가수 인순이의 노래를 독백인 양 흥얼거렸다.

      “난 꿈이 있었죠. 난 꿈을 믿었죠.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때론 누군가가 ......

  창자(唱者)는 누구고 청자(聽者)는 누군지? 한 음절 멈칫거렸다 잇는 거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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