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의 연대별 시 3제
페이지 정보
본문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외(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시(詩)의 이슬에는
멧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껴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늙은 사내의 시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 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 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서정주 1915년~2000년. 아내 방옥숙 별세 2달 후, 향년86세 별세)
- 이전글주님의 부활하신 장면을 생생하게 바라보니 ... 11.03.11
- 다음글{시} 점박이 무당벌레 / 이영희 11.03.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