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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고무신 - 최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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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고무신       최원한
 
내일은 쓰레기 수거차가 오는 날이다. 차고 문을 열 때마다 눈에 거슬렸던 박스들을 오늘은 꼭 치워야겠다. 
오랜만에 오락가락하던 비도 끝이고 내려앉았던 구름도 걷히니 묵직하던 머리가 저절로 상쾌해졌다. 창문을 열어 놓으니 밝은 햇살이 집 안으로 눈이 
부시게 밀려들어 오며 바람까지 살랑살랑 따라 들어온다. 

‘그래, 치우자!’ 숙제처럼 미루어 놓았던 박스들을 정리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빈 박스들을 내다놓고 보니 저쪽 구석에 흰 플라스틱 상자가 
눈에 띄었다. 아! 이 참에 저 안의 물건들도 치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일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들이다. 혹시나 하고 골라 두었던 것을 얼른 치우기가 싫어서 그냥 그 자리에 두었었다. 상자를 끌어내어 뚜껑을 
여니 코에 익은 나프탈린 냄새가 났다. 어머니가 쓰셨던 옷장을 열면 나던 그 냄새였다.
“엄마! 괜찮죠?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구, 엄마도 남에게 나눠 주는 거 좋아 하셨잖아요.”
마치 어머니가 옆에 계시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한복이며 속옷들은 쓰레기 백에 넣고 쓸만한 것들은 박스에 골라 담았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스웨터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고 또 바지를 들어올려 가슴에 품어 보면서 어머니 생각에 빠져들어갔다. 

이제는 신발들을 챙길 차례다. 뒷굽이 없는 편하게 생긴 운동화가 갓 빨아 놓은 듯 새것 같았다. 이 정도면 맞는 사람에게 줘도 흉 잡히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되어 고무가 딱딱해진 꽃 고무신도 나왔다. 예쁘지만 플라스틱 백에 미련없이 넣었다. 

마지막으로 상자 한 개가 남았다. 뚜껑을 여는 순간 아! 엄마! 
가지런히 놓인 하얀 고무신. 깨끗하고 고운 모습이 어머니를 만난 듯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왈칵 눈물이 나왔다. 분명 몇 번을 신으셨을 텐데 금방 
씻어 말린 후 분가루라도 바른 듯 뽀얗다. 이곳저곳으로 옮기느라 상자 안에서 움직여졌을 법한데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고무신 코 끝이 
납작해지지 말라고 얇은 종이를 뭉쳐서 코끝에 구겨 넣으셨다. 어머니께서 쪼그리고 앉아 종이를 구겨 넣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감히 
만지기조차 조심스러워 콧끝만 톡톡 건드려 봤다. 

‘이 걸 어쩌지? 버릴까? 말까?’ 이 물건들을 받을 사람은 분명 외국 사람이라 전혀 필요 없을 텐데...나는 사이즈가 안 맞아 신을 수가 없고 
한 참을 망서렸다. 눈 딱 감고 플라스틱 백에 다른 것들과 같이 넣어 밖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집 안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다른 일들을 하는데 자꾸만 흰 고무신이 눈 앞에 아른거리더니 코끝이 찡해졌다. 일 년 전, 이맘 때 양료병원에 계시던 
어머니를 한국으로 모셔다 드리고 왔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어머니는 돌아 가셨다. 

정신이 오락가락 한 상태로 양로병원에 누워 계셨어도 나에겐 의지였었고 울타리 였었는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마지막까지 깨끗하고 고운 모습으로 계셨던 어머니는 꼭 저 상자 안의 고무신과 같이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뛰어나가 쓰레기 통 안을 뒤져 고무신 상자를 들어올렸다. 뚜껑을 열어 고무신을 가지런히 놓은 뒤 상자를 가슴에 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열어봐야지. 어머니처럼 흐트러지지 말고 깨끗하게 고운 모습으로 살아야지. 하얀 고무신이 담긴 상자를 벽장 선반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보물을 간직한 듯 마음이 든든하고 뿌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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