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바다 (시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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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바다
강위덕
눈물이 바다가 된다면
기쁨쪽으로 헤엄쳐
저 멀리 수평선에 걸리고 싶다
출렁거리는 바다에도
분명 끝은 있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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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848년에 태어난 백선영는 본래 이름이 없었습니다
14살까지는 아가로 통했고 결혼한 2년동안은 새댁으로 불렀고
나무지 70 여년은 백과부로 불리어졌다가
70고령이 된 다음에야 선행을 많이 했다하여
처음으로 백선행으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7세에 아버지를 여위고 편모슬하에 공부를 못한 그는
14세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으나
2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과부가 된 백선행은 억척으로 돈을 뫃아 재벌이되었습니다
1917년 백선행은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말만 믿고
평당 1전의 시가밖에 안 되는 땅을 7원을 주고 땅을 샀습니다.
나중 씨멘 원료인 석회질이 많이 있다는 것이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어
산가격의 10 배가 넘는 70불에 매매가 되어
그의 부는 갈수록 더해갔습니다.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평양 시내 사립학교 창설에 수십만 원을 기부했고
객산교(客山橋) 다리를 놓는데 전액 비용을 부담하였습니다.
공회당 건립 때에도 건축비 전액을 부담하였습니다.
그 후 평양에서 세워준 백선행 기념관과
그의 동상은 현재까지 평양시내에 남아 있습니다.
그 여인은 무식하지만 교육 사업에 공헌이 많으므로
그를 교육가라고 불렀습니다.
1933년 5월 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을 때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는데
장례식 날 평양 주민 3분의 2가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또 한 가지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하여 2년 밖에 살지못하고 남편이 죽었지만
단 2년의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하였습니다.
무슨 죄목인지는 몰라도 상당 기간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남편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도 백선행은
고향을 떠나 남편이 사는 감옥(監獄) 근처에 움막을 치고
장사를 하며 매일 남편의 면회를 하면서 사식을 넣어주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난 다음 행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거부가 되었지만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에는 재산을 아끼지 않았는데
남편의 묘지만은 마치 왕의 능처럼 거대하게 묘지를 장식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92년 회고록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일제 강점기에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전쟁 영웅으로 존경했다고 썼습니다.
1925년에는 그녀는 자기의 전재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에서 상을 주려고 했으나 거절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마치 눈물의 바다 같았지만
기쁨 쪽으로 헤엄쳐간 산 모범 인물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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