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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어머니 단상 / 안 금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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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그것도 성탄절이 지나고 한해를 정리하는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어머니가 몹시 그립다.

아주 먼 옛날 때는 1951년, 한국 6.25 동란 때 이야기다.

내가 거제도 학산 마을에 세워진 임시 피난 학교에서 공부할때 였다. 남도의 겨울 바람이 만만 찮케

휘몰아치던 12월의 어느날이었다. 거의 반년동안 뵙지 못한 어머님을 만날심사에 만양 들떠

그동안 스켓치해 온 내 작은 잡기장이며  들려드릴 이런저런 이야기거리도  정리한후 자취방문을 황급히 열었다.

바로 그때 막 도착하신 어머님이 "옥아...."하시는 함성이 산산 조각 박살나서, 파편되어 내가슴에 박혀왔다.


두번째방문오신 어머님의 기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간절하고도 다급한 소원이 있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 여름에 오셨던 어머님의 첫 방문을 연상해 보았다. 연두 빛 갑사 저고리에 짙은 가지색의 옷고름과

치마, 한눈에 나를 어리둥절케 했던 어머님의 아름답고 다소곳했던 그 모습을, 나는 내심 동료 학생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그런 기회를 허락지 않고 둔덕지구 지서장으로 발령을 받아 오신 

내 외삼촌을 만나야한다며 어떤 마을 어르신과 함께 곧장 떠나가셨다. 그 때 어머님이 만들어 오셨던 나막 김치가

어찌나 맛이 좋았던지 내 셋 방 주인 아주머니께 거의 다 뺐기고 몇번 먹지 먹지 못한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번엔 특별한 반찬도 없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민짜 밀 전병도 없다. 다만 우리집 소산인 홍시만 옹기에

차곡차곡담아 오신 걸 보아 몹시 급한 걸음을 하신게 분명하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어머님은 그 날 성경에 기록된 에스더와 같은 처지와 심정으로 거제도를 방문했으며

일 이차 방문  모두가 죽음에 처한 형제를 구하기위해 지서장이었던 당신의 동생과그의 상사를 만났던 것이었다.

시대가 6.25사변으로 전국의 피란민들이 거제도로 제주도로 다 흩어져 국가의 보조금과 미국에서 오는 구호금,

구호품으로 인해 처리할 업무가 태산 같을 때 였다. 따라서 지구마다 이러 일을 관할할 지구장을 택하여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게하였다. 그 때 우리가 존경하는 한 선생님이 이 일을 담당할 수 있는 적임자로 피선되었다.

그 선생님은 저희 피난학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 쳤으며 덕망이 있고 신앙심이 투철하신 분이셨으므로 

매사에 성심 껏 일을 돌보던 중이 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렇듯이 악의; 씨가 자라 선한 양심을 짓밟기 시작하더니 

중상 모략이 도를 넘어 투옥시키라는 투서를 당국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문제는 엄청난 죄목들을 만들어 

사람을 매장시키려는 저 악행을 저지시키고 돌이킬 방법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때에 하나님은 선생님을 구할 

기이한 길을 준비 하셨던 것이다. 부산에 근무하시던 내 외삼촌이 갑자기 거제섬 둔덕 지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사실상 좌천을 당한 일이라 외삼촌도 의아해 했으며 온집안이 먹구름아래 언잖아 했었다. 거제 학산은 바로 둔덕

지의 관할구였다. 그때에 어머님이 누명과 곤경에 처한선생님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며 발벗고 나서라는 마음의 

동요를 뿌리치지 않고 전면 실천에 옮기셨던 것이다. 비록 동생 앞에 나아가지만 가장 아르답게 꾸미 셨고 

쉬지 않고 기도하셨고 맘매 무새며 용기를 잃지 않으셨다.그 후 선생님의 누 명은 벗어 젔고 오히려 그 잔악한 자들의 

우두머리가 위증죄로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하나님의 부리시는 여종 노릇을 맡아 신실하게 담당한 어머님을, 그 보다 그런 은총을 입으셨던 어머님을 정말 

부러워한다. 그 것도 12월이 오면 더욱 그러하다. 그 화사하고 품위 있으 셨던 여왕의 모습으로 나의 뇌리에 뚜렸해 진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그동안 우리 온 식구들, 육남매의 식 솔 모두가 미국으로 와  이민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부모님도

장자인 오빠네 집에서 주로 생활하시다 이 아들 저 아들, 이딸 저딸 집으로 옮겨 지내시기도하며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무료한 재미없는 이민 생활 나그네 생활을 하고 계셨었다. 우리아이들은 아빠 유학시절 동안 엄마를 대신해 먹이고 

입히고 씼기셨던 할머니를 너무나 좋아 하기 때문에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시는 것을 항상 고대하고 기뻐 했다. 


어머님이 70세 가 되시던 해 였다. 생일  잔치상을 차려드릴려고 아주 분주하게 일하였다.

이름있는 잔칫상 음식은 거의가 다 준비가 되었고 내가 자라면서 보아왔던 안씨집 당골/  야채 전골만 마지막 음식으로 

남았었다. 나는 갖은 채소들을 줄지어 담아 놓고 막 칼질에 들 어 갔다.  그 때 어머님이 옆에 오시더니 아이야 이게

웬 일이냐? 세사이 어그러 졌다고 너의 칼질까지 그리 닮을 필요 없지 않냐 ? 요즘 사람은 다 삐뚤어 졌으니 그결과가 

고스란하구나 . 엇비슷하게 말고 반듯 반듯 예쁘게 썰어라. 실은 나는 멋내느라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일부러 장난을 

부렸던 것이다 . 내 증조모님은 백수를 향수 하셨던 궁중 음식 담당 상궁이셨으며 . 그 마지막 임금님음식을 시식하는 

최고 상궁이셨다. 나는 그 날 어머님이 시집와서 겪었던 여러가지 부엌에서의 감질난 이야기들을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먹던 탕수 국은 증조 할머니의 작품인 동시에 우리집안 고유 음식으로 아직도 명명되고 있다.

어머님의 꾸지람을 듣짜 채소를 반듯 반듯 다시 썰고 어머님의 지시에 따라 그 요리 순서도 지켜가며 ,

그랬더니 아-- 진짜 맛난 전골이 되었었다.

그 후부터 칼질할 때마다 내 마음의 거울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삐뚤어지지 않은 반듯한 마음을 가짐을 갖자.

이렇게 어머님은 부엌 한 자락에서 항상 아니 순간 순간 나와함께 대화하신다 

이렇게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마음에간직한 나는 참으로 복있는 자로 여기며 감사한다.


10년도 더 지난 12월29일 밤 탐슨 병병원에서 연락이왔다. 어머님이 임종이 가까 왔다는 소식에 화들작 병원에 도착했다.

이미 호흡이 순조롭지 않았고 약간의 미소만 보였을뿐 말없이 손만 잡고있었다. 나는 서서히 어머님의 마지막을 맞고 있었다

21세, 그 당시 처녀 환갑이라는 나이네 안씨 집안에 시집와 다행이도 예수를 믿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어깨 너머로 언문을 

깨치고 성경이 글배우는 전 교과서가 되었던 터라 어머님의 신앙심은 타의 추종을 허락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였다. 

아버님의 말씀엔 일본에서 한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때 목사님의 중매로 첫 만남을 가젔는데 어찌나 부끄럼이 많아 고개를 

들지 않기에 도무지 얼굴을 볼 수없어 계단으로 유 인한후 아버님이 두어 계단 내려가서 아래서 처다 보았는 데 얼마나 

예뻤던지 첫 눈에 반했다고 했었다. 내 어릴적 기억으론 어머님은 모든걸 능숙하게 아는 분으로 남아있다.

내가 묻는 것엔 모두 척척 박사였으며신문은 온지면을 빠짐없이 훑어 읽으셨다. 그래서 공장에 필요한 원자재 가격에 훤해

아버님의 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신문에 실린 연재 소설도 다 꽤차고 있으셨다. 한문은 언제 배우셨는 지 모르는 글자가  

없으셨다. 나는 가끔 어머님의 그 총명한 기억력이 전수된 행운을 실감하며 감사치 않을 수가 없다.


예뻐셨던 어머니, 지혜로우셨던 어머니, 신앙심이 깊으셨던 어머니,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마치 성경 사무엘상  25장에나오는, 후에 다윗왕의 아내가 되었던 아비가일을 연상케한다.

어머님의 손은 차가워졌다. 이제는 영영 헤어져야만한다. 그런데, 내귀에 너무나 또렸하게 들리는 어머님의 음성음....

"나는 네가 죽으리라는 걱정은 한 순간도 한적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하나님께 맡겼으니까 . 오하려 네 언니와 오빠를

너와함께 선지자 학교에 보내지 못한 나의 작은 믿음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이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단다 ."

이 말씀은 6.25 사변을 당하여 걸어서, 혹은 석탄 실은 기차 칸에서 빗물에 잠기기도하며 겨우 겨우 집에 도착했던 

1950년 7월1일그 토요일 (안식일)에 어머님께서 내게 들려 주셨던 그의 신앙 고백이셨다.


이렇게 어머님은 내곁을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늘 어머님의 신앙안에 , 하나님께 맡겨진 딸로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며 산다. 

그래도 어머니이 너무너무 그리울 때가있다. 그것도 성탄절이 지난 12월 말이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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