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시) 이기철시인 발췌 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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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시 (이기철시인 발췌 시. 1~5)
* 나무들(1) / 이기철
나무들이 밤에도 움직이지 않고 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나를 긴장시킨다.
어떤 명령도 나무들의 뿌리를 옮겨 놓지 못하는
나무들만의 저 푸른 질서.
땅 속에서 누리는 뿌리의 삶이 고요해서
잎새들의 공중의 삶은 소란하다.
땅의 피를 빨아올려 하늘로 옮겨주는 나무들,
침묵을 길어 음악을 만드는 악사들,
둥치를 감고 오르는 호박 새순이 어디로 뻗을 것인지를
나무들은 안다.
새들이 날아오고
마을 곳곳에 집 짓는 톱날 소리 치차(齒車) 소리처럼 들려와도
벌레들은 그 단단하고 따뜻한 집을 가지에 매단다.
나무들이여, 너의 나이테는 아직 열 살이기에
내일을 약속 받을 힘이 있다
욕망이 작아 가지에 매달려도
흔들림이 오히려 편안한 벌레들의 집은
나를 긴장시킨다.
* 카뮈(2) / 이기철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카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音域)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위대했다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고
그대의 방아쇠로 사람을 쏘고 싶었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광과 환희는,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아직도 나는 반도의 남쪽 도시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밤새워 쓰고 있지만
이 병 이 환부 세월 가도 아주 낫지는 않겠지만
* 고등어(3) / 이기철
새로 사온 등 푸른 고등어를 보면
나에게도 저렇게 등이 푸른 때가 있었을까
만 이랑 물결 속에서 대웅전 짓는 목수의 대팻밥처럼
벌떡벌떡 아가미를 일으키던 고등어
고등어가 가보지 않은 바다는 없었으리라
고등어가 가면 다른 고기들이 일제히
하모니카 소리를 내며 마중 나왔으리라
고등어가 뛸 때 바다가 펄떡펄떡 살아나서
뭍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으리라
푸른 물이랑이 때리지 않았으면
등이 저렇게 시퍼렇게 멍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그래, 바다의 치맛자락이 만 겹이었다고
아직도 입을 벌리고 소리치는 고등어
고등어가 아니면 누가 바다를 끌고
이 누추한 식탁까지 와서
동해의 넓이로 울컥울컥 푸른 바다를
쏟아놓을 수 있을까
*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4) / 이기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본가(本家)를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 여자를 위하여(5) / 이기철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 나무들(1) / 이기철
나무들이 밤에도 움직이지 않고 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나를 긴장시킨다.
어떤 명령도 나무들의 뿌리를 옮겨 놓지 못하는
나무들만의 저 푸른 질서.
땅 속에서 누리는 뿌리의 삶이 고요해서
잎새들의 공중의 삶은 소란하다.
땅의 피를 빨아올려 하늘로 옮겨주는 나무들,
침묵을 길어 음악을 만드는 악사들,
둥치를 감고 오르는 호박 새순이 어디로 뻗을 것인지를
나무들은 안다.
새들이 날아오고
마을 곳곳에 집 짓는 톱날 소리 치차(齒車) 소리처럼 들려와도
벌레들은 그 단단하고 따뜻한 집을 가지에 매단다.
나무들이여, 너의 나이테는 아직 열 살이기에
내일을 약속 받을 힘이 있다
욕망이 작아 가지에 매달려도
흔들림이 오히려 편안한 벌레들의 집은
나를 긴장시킨다.
* 카뮈(2) / 이기철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카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音域)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위대했다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고
그대의 방아쇠로 사람을 쏘고 싶었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광과 환희는,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아직도 나는 반도의 남쪽 도시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밤새워 쓰고 있지만
이 병 이 환부 세월 가도 아주 낫지는 않겠지만
* 고등어(3) / 이기철
새로 사온 등 푸른 고등어를 보면
나에게도 저렇게 등이 푸른 때가 있었을까
만 이랑 물결 속에서 대웅전 짓는 목수의 대팻밥처럼
벌떡벌떡 아가미를 일으키던 고등어
고등어가 가보지 않은 바다는 없었으리라
고등어가 가면 다른 고기들이 일제히
하모니카 소리를 내며 마중 나왔으리라
고등어가 뛸 때 바다가 펄떡펄떡 살아나서
뭍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으리라
푸른 물이랑이 때리지 않았으면
등이 저렇게 시퍼렇게 멍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그래, 바다의 치맛자락이 만 겹이었다고
아직도 입을 벌리고 소리치는 고등어
고등어가 아니면 누가 바다를 끌고
이 누추한 식탁까지 와서
동해의 넓이로 울컥울컥 푸른 바다를
쏟아놓을 수 있을까
*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4) / 이기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본가(本家)를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 여자를 위하여(5) / 이기철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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