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어떻게 옳게 살까!
페이지 정보
본문
...............................................................................................................
...............................................................................................................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가 그
나라를 말아먹는 이들이 있음을 현세에서도 보게 된다. 참으로 웃기지 못할 비극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극악하고 한껏 질긴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런 표본이 세상
어디에 있을 거라는 심증을 굳히게 한다.
기독교진리는 이점에서 옳다.
기독교에서는 이미 그것이 사단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는 자라고 말한다.
또 어쩌면 사람 보기에는 사람이 고상하고 선하게 보이며 선망의 대상이라도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미 그런 자의 또 다른 내면의 이면성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를 간간히
목격한다.
자아가 급기야 손상이라도 입는 날에는 내면의 보복심리가 무섭게 불타오르는 경우를
본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이런 것들과 달리 살 수 있을까? 싶어진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하기 보다는 상처 받는 우리의 마음의 노출 때문이다.
마귀를 의식이라도 하고 항상 마귀라는 놈을 격퇴하기 위해 그 마귀를 전공이라도 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그런 삶이 방어되고 급기야 선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나의 독단적인 생각이지만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는 인간의 노력과 그 무
상함을 잘 묘사는 했지만 그의 정신세계의 심연에 깊이 뿌리내린 허무는 실로 또 다른
자살의 바다로 몰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이 마귀를 방어하고 선하고 행복하게 살며 남을 복되게 사는 삶의 비결은 어떻게
마귀를 방어하는가에 달려있기 보다는 항상 인류의 표본이 되는 그리스도를 닮고 그
의 베푸시는 은혜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얼마나 그 은혜에 몰입해 살고자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스도 복음이 사람을 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지 어떤 각진
모조나 긴장된 방어의 지성에 있지 아니한 것이리라.
역시 평소의 삶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경우가 적용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공적은 장래의 견고한 터전을 쌓든지 아니면 쉬 허물어질 모래성을 쌓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한 것이리라.
..............................................................................................................
.............................................................................................................
- 이전글{어른과 함께 보는 창작 동화} 그니울 보다 더한 것 11.08.26
- 다음글못 믿을테면 믿지 말라 하지 11.08.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