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단편소설} 고금도명사 이일원박사/새장에서 천리를 향해 날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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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이는 정오쯤 해서 부엉이산으로 올라갔다. 일원이는 가만이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자기가 사는 집을 물끄럼이 내려다 보았다. "왜 우리집은 오늘 따라 저리도 옹색한 자리에 자리잡은 것이 그리도 못나게 보여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는 고개를 돌려 앞산 쪽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일구어 놓은 넓은 땅이 의젓하게도 비스듬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미소했다. 사실 자기가 더 이상 공부하지 못한 분풀이를 이 땅에다 쏟아부어 만들어 낸 값진 걸작품 터전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원이 눈에는 "마치 황폐 되고 불모의 땅이던 것이 이젠 기름지고 수려한 땅이 되지 않았느냐" 싶어졌다. "사람이 직접 먹고 살 것이 나오는 농사 일은 확실히 '천하지 대본'이야. 이런 일은 장한 일이야." 라고 가슴 뿌듯하게 생각되어졌다.
일원이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사람의 미래란 얼마든지 이렇게 개척해 낼 수 있고 또 꼴지어질 수 있을 거거든..." 그랬다. 그러다가는 일원이는 또 달리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원이에게는 아직도 다 포기하지 못한 한 생각이 중심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엉(이)산', 가만이 한 자리에 앉아서 두 눈만 크게 뜨고 내려다만 보고 있는 부엉이가 되면 무엇 하겠느냐. 이 산 이름을 고쳐 주자. '공부산'이라고. 어쩌냐? 넌 이제부터 재발 부엉이가 되질 말아라. 이제부터서는 넌 '공부산'이야. 일하는거야. 공부하는 거야. 알았지. 잘 알았지. 그런데 '공부산'아, 잠시만 기다리거라. 다녀올 데가 있으니 그동안 잘 있거라."
일원이는 공부산 후미진 곳을 거의 다 돌아내려왔는데 공교롭게도, 아니 뜻밖에도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추월이가 나타나 이리로 걸어오지 아니한가. 좁은 길에서 마주 오는 추월이를 서로 만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왜선지 조금 서먹하기는 하지만 무척 반가웠다. 전신의 피가 휭하고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감돌면서 금새 화끈한 열기를 더해주는듯 했다.
"추월아, 여기서 널 만나다니 반갑다. 그러잖아도 오늘 오후쯤 꼭 한 번 너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좀 맞게 여기서 널 만났구나. 참 반갑구나. 지금 어딜 가니?"
추월이는 웃음 띈 얼굴 표정하며 화사하게 이렇게 말했다.
"일원이 넌?"
추월이 역시 날 만나서 무척 좋은 모양 같았다.
"나? 나 말야. 내일 아침 천리길 포항을 간단 말야. 그래서 공부산 갔다 오는 길이거든."
"공부산? 우리 동네 공부산도 있었던가? 그런데 정말 네가 포항을 간다고... 우리 고모 산 데가 거기라던데... 와, 좋겠구나! 육지도 가보고 참 좋겠구나!"
"그런데 추월아, 부러워하지 말아라. 내가 널 평생동안 이천리가 뭐니, 수만리 길이라도 구경시켜 줄 때가 곧 올테니 날 믿고 날 기다리고 있거라. 포항 같다가 반드시 곧 네게로 올테니 말이야... 아 참, 추월아, 네 이름이 추월 아냐.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같이 살 꿈, 추월해 가지 마, 응!"
"일원아, 고맙다. 그런데 추월해 가지 말라고? 무슨 뜻이야? 일원이가 유식해졌네."
"그렇구나. 추월이가 자동차길 달리기를 잘 모르지. 그런데 그것 가지고 유식이라니... 그래, 암, 유식해저야지! 유식해저야 하고 말고! 잘 알았다. 두고 보아라!"
그런데 추월에게 무언가 서글픈 일이 있는 건지 와락 슬퍼만 보였다. 추월이는 이렇게 말한 다음 고개를 반쯤 숙이고 돌아서려 했다.
"일원아, 잘 다녀 와!"
일원이는 추월이 앞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추월아, 왜 그러니?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니? 내가 있지 않니. 그러지 마. 지금 날 기다린다고 그래 줘..."
"일원아, 기다리기만 하겠어. 당장 보고싶고 그리워질 것 같은데... 넌 내 맘 몰라..."
"아, 그래, 그래서 그랬니. 인젠 네 마음 잘 알았구나. 또 알아줄께. 추월아. 그럼 그렇게 네 맘 알고 곧 잘 다녀올께, 응. 아 참, 여기 길가에 핀 이렇게도 예쁜 들꽃이 우릴 반기고 있네. 너와 날 위하여... 추월아, 이게 므슨 꽃이지? 잘 드려다 봐. 이꽃이 추월이 같이 아름다운 데가 있어. 우린 예쁜 꽃, 들꽃이 되자구나. 내가 군대 갔을 때 말야 나 들꽃하고 대화하고 살았어. 그때도 널 많이 그리며 생각했었지 뭐더냐. 이것(들꽃)을 붉은 장미꽃이라고 생각해 줘. 자, 이 장미꽃다발을 내 진정 사랑하는 추월이 가슴에 바치면서...하하하...허허허... 좋고 좋구나!"
"일원이, 네 맘 잘 알았어, 고마워! 잘 다녀와. 그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테니..."
추월이는 얼굴을 들어 한참동안 일원이의 얼굴을 연민의 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사실 추월이는 아랫 동네 잘 사는 집 애인데 동갑내기이지만 일원이가 생일이 빨라 오빠 정도가 되고 철없을 땐 같은 반에서 친숙하게 공부를 함께 했었다. 추월이는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다만 여자 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리도 바라고 소원하는 중학교 진학을 못했는데 반에서 5등을 한 놈 치고 일원이 만양 가슴 아픈 생각을 지니고 속알이를 하고 있는 터였다.
추월이는 머리가 영리한 애였다. 이쁘고 마음씨 곱고 정겨운 애였다. 흠잡을 데가 없는 착한 애였다. 강직한 것과 아주 부드러운 것, 둘 다를 함께 가진 애였다. 어쩐지 추월이가 좋아 학생 때부터 일원이는 그 애만 보면 부등켜 안고 싶고 오래 함께 있고싶은 애였다. 그런데 언제라도 가만 보면 추월이는 나를 좋아하는 눈치 같았다. 가령 씨름을 해도 나를 응원하는 눈치였거든... 그 애는 항상 그랬다.
그러나 학교도 더 가지 못하는 주제에, 더욱이 그집에 비하여 우리 집 꼴하면 꼭 털어놓고 싶은 말을 좀체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추월이 같이 귀한 집 애를 대려다가 어떻게 살릴려고 그러는지 어림도 없는 일 같기도 하고 추월이 홀어머니는 날 좋아하는 눈치 같지만 이리 집 사는 꼴 보고 막상 그 생각이 엉뚱할지도 모른다는 나 나름의 자신이 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전에는 추월이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가 들렸다고 하면서 싸리문 울타리 위에 널어놓은 마른 빨래를 거두어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잘 개놓고 가는 것이었었다. 그런데 그땐 차마 무심하게도 내가 추월이에게 무슨 인연을 암시하는 말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때 일원이는 참 이상한 느낌을 가졌었다. 그 빨래에서 추월이 향취가 물씬 물씬 나는 것 같아 그 빨래를 한동안 그대로 놔두고 향취를 맡은 적이 있었다. 생각할수록 참 좋은 애였다. 어쩌면 틀림없이 오래 전부터 이 일원이의 마누라감으로 점지한 천생배필 여인 같기만했다.
그 애가 여러 차례 결혼 상대를 거부한 것도 필시 나 때문이었을 게다. 아마도 그에겐 혼처문제가 목에 찬 어려운 시련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으면서까지 말못한 바로 그것을 오늘 다 추월이에게 서스름없이 말해버렸다. 너무나도 가슴 시원하고 좋았다. 추월이도 그런 것 같았다. 만약에라도 지금 추월이 하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난 어느 누구하고라도 이젠 결혼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것은 꽤 오래 된 일원이의 생각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좀 맞게 단둘이서 자연스럽게 서로 만나 나도 모르게 겁없이 막말을 다 해버리고 만 것이다. 신의 섭리라고 하더니 신의 섭리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하지 않고는 도대체 이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일원이는 추월이 얼굴 보얀 것, 그 눈-매, 그 입술하며, 깜직하고 이쁘기도 하지 하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발길이 집 앞에 이르렀다.
5월 14일, 유난히 청명한 아침이 환히 밝아오고 있었다. 일원이는 어느 때 보다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 지지개를 한번 켜고는 "오늘은 이 일원이의 날이다!" 고 외쳤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일원이는 군대생활을 빼고는 육지를 향하여 이런 여행길이란 처음 해보는 경쾌한 경험이었다.
일원이는 멀리까지 마중 나온 부모님을 아스라이 뒤로 하고 걷고 배를 타고 또 자동차를 타고서 천리길 드디어 포항에 도착했다. 포항 역시 화창하고 맑은 날씨여서 참 좋았다. 일원이가 시외뻐스장에 막 도착했을 때 숙부 내외가 벌써 마중 나와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다 한다. 숙부님은 어렸을 때 뵌 적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처음 만나 뵙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숙모님은 일원이가 차에서 내릴 때 누구일까 해서 "일원~", 하고 계셨다.
"일원짜리, 여기, 여기예요!"
"오, 잘 왔구나! 반갑구나! 유머감각도 있구먼. 와, 키가 크기도 하지."
"빈수수대 176이예요."
"무얼 먹고 이렇게 컸을까?"
"보리밥, 조밥, 수수밥이죠. 하하하... 허허허..."
".........................................."
일원이 숙부모는 택시를 부르더니 택시가 오자마자 일원이를 태우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야, 포항이 좋네요! 페어랜드네요!"
"'페어랜드'(fairland)라. 어려운 말을 쓰는구나. '선경', '무릉도원', 뭐 그런 뜻인데..."
그러다가는 숙부님은 엉뚱하게 말씀했다.
"네 이름 좋지. '일원', '하나의 으뜸', '으뜸 하나', 그런 뜻이거나 이원(론)이 아닌 '한 원리'로의 '한 뜻'으로 풀이 되는 그런 뜻이 아닐까. 하여간 뜻이 하나로 묶여진 좋은 이름이거든... 아마 '일원짜리'라는 말로 풀이를 한다고 해도 대단한 것이거든... '일원'은 경제단위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통솔하는 기본 단위이거든 ...그리고 '일원' 아니면 돈을 두고도 사람이 돈에 손대거나 정복할 수 없거든...네 이름을 지은 아버지는 뜻이 있는 분이시야. 오랜동안 병환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오셨지만 아버지는 훌륭한 데가 많아..."
"예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제 생각이 숙부님 생각과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 해석을 미처 그렇게까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숙부님 말씀 듣고보니 제가 살아오면서 내가 나 되기를 바라는 정신을 그대로 설명해 주신 것만 같습니다. 숙부님의 그해석 말씀 꼭 귀중하게 기억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아하니 네가 영특하고 당차게 보이는구나. 됐다. 널 이곳 포항에서 취직을 시켜주마!"
"숙부님, 방금 뭐라고 말씀 하셨죠!"
"이곳에서 취직을 시켜줄테니 잘 해보거라. 네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넌 고금도에서 농사일로 살 순 없는 애라고 그러시더구나. 잘 해 봐!"
"예에-!, 숙부님, ..."
이러는 찰라에 아쉽게도 차가 벌써 숙부님 집 앞에 도착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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