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단편소설} 고금도명사 이일원박사/세계의 하늘, 영국 런던으로 날아라!(8-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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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하늘, 영국 런던으로 날아라!]
일원이 일행을 태운 차는 일원이 부부가 그리도 선망해오던 서울을 향해 경부고속도로를 싱싱 달리면서 북상하고 있었다. 이들의 일대 전환인 이 목적, 이 여행은 바야흐로 빈곤의 시대를 장하게 이겨낸 비상한 상징이며 승리가 아닐까. 그래서 "어서 가자, 어서 가. 서울로!"인 것이었다. 인쇄소 소장은 착한 기사가 되고 일원이 부부는 귀빈이 되어 뒷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소장의 극구 그렇게 권유한 말씀을 따라서였다.
일원이가 탄 차는 고속도로상에서 급유를 한번 한 다음엔 줄곧 장시간을 달렸다. 드디어 말없이 앞을 향해 줄곧 달리기만 하던 소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서는 서울이다!", 그랬다. 그러자마자 추월이가 "야, 서울!" 그랬다. 추월이는 꿈에서라도 꿈꾸어보지 못한 서울이었다. 추월이로서는 눈이 휘둥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신기했다.
이리하여 이들 일행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원이네 식구가 살 집은 조경쎈터 그 코너에 간이식으로 길게 잘 지어진 집인데 어쩌면 오히려 포항에서 보다 더 단독집으로 좋은듯 했다. 게다가 방이 두개나 되지 않는가.
일원이 부부는 바로 이때로부터 일원이가 학교를 다니면서도 조경팀이 아침 저녁으로 들고 날 때 모든 자료와 기구들이 완비되도록 돕고 조경쎈터 관리에 만전을 기해주면 되는 것이었기에 열심히 하느라 애썼다. 일원이는 이제는 대학교를 다니는 새로운 기쁨이 있는 데다가 관리쎈터의 돌보는 일들은 오히려 포항에서 보다 쉬어져서 너무나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소장 부부 역시 포항의 소장처럼 꼭 같이 친절하고 좋은 분들이었다. 알고보니 그들이 본디 다 근본 성품들이 좋은 분들이었다. 어느덧 일원이는 소장과 함께 매우 친숙한 관계가 되었고 이렇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1년 안에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또 잊지도 못할 두가지 기적이 일어났다.
일원이는 고금도에 계신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온 것이다. 일원이 부모님은 갑자기 시골에서 번화한 서울에 와서 살게 된지라 처음엔 매사 눈이 휘둥글해졌지만 날이 가고 달이 지나갈수록 이젠 매사가 예사가 되어졌다. "이렇게 매일 쌀밥에다가 고기반찬만 먹고 살게 되면 좋기는 하지만 이러다간 집안 망한다!" 라고 걱정하면서 자주 말씀하신 이야기들도 이젠 차츰 뜸해지고 의외로 아주 행복해하며 즐겁게 나날을 지내게 되었다. 이것을 알게 된 일원네 부부로써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되어졌다.
또 하나는 일원이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전액장학금을 받게 된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원이는 이 기쁜 소식을 추월이와 부모님께 전했다. 그리고 숙부와 인쇄소 소장에게 전화로 즉시 말씀드렸다.
"숙부님, 기쁜 소식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전액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 신문사가 와이대학에 2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제가 받게 되었습니다. 숙부님, 이젠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숙부님 너무~ 감사감사합니다!"
"아, 그렇느냐! 잘했다. 기쁘다. 이젠 한숨 돌리게 되고 걱정을 놓겠구나! 계속해서 정진해라!"
"예, 숙부님!"
".........................................................................."
이리하여 일원이가 이렇게 학문에 전념하게 된 몇년 새에 이 가정에는 아들 둘이 태어나서 오붓하게 자라면서 서울에서 사는 행복한 가정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었다.
일원이는 와이대에서 정외과 석사과정을 다 마칠 무렵에는 영국의 런던의 대학으로 국제정치학 전공을 위한 박사과정 교비 아니면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었던 것 같다. 영어시험에 의하면 일정한 시간 내에 적고싶은 단어를 적어보라는 시험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일원이는 홀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추월이의 한몫은 남자 한사람을 능가할 일이어서 생활에는 염려할 것이란 없었다. 일원이의 여러 해 영국유학생활에서는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들이야말로 일원이 부부의 평생을 꼴짓는 셈이 되었다.
그는 토요일인 안식일에 예배하는 기독교의 진실한 신자가 된 것이다. 우연한 기회였다. 신의 인도와 섭리에 대한 어느 목사의 가르침이 신에 대하여 궁금해오던 일원이의 마음을 충족시켜주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주었으며 자기 생애의 향방과 가치관을 단번에 꼴짓게 해주었다. 이리하여 훗날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 살면서 열열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일원이가 국제정치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모교에 그대로 남아 이 대학 교수로 평생동안 봉직하게 된 일이었다.
다음 내용 이야기는 일원이가 박사학위를 받기 반년전 이야기이다.
일원이는 주임교수인 노교수 제임스 박사가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어느날이었다. 제임스교수는 그의 "동료이자 학장인 클락박사가 미스터 리를 만나고자 한다" 라고 하면서 아주 사랑스럽게 일원이를 클락박사에게 소개해 주었다. 하긴 클락박사를 일원이가 잘 알고 지내던 터였다.
그래서 일원이는 노교수 클락박사를 만났는데 그가 한가지를 제안했다. "한주일 동안 매일 한시간씩 나와 더불어 국제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탐회하게 나누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한 주 내내 일원이는 매일 1-2시간씩 클락교수와 더불어 열띈 토론시간을 가졌는데 마지막 시간에 클락 박사가 일원이 더러 이렇게 신중하게 물었다.
"미스터 리, 이 학교에 남아 교수할 마음이 있소?"
일원이는 클락박사로부터 너무나 갑자기 받는 질문인지라 이 말에 어리둥절한 남어지 어쩌면 엉겹결에 솔직한 말을 이렇게 했다.
"나는 부모님을 돌보면서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학위를 받자마자 곧 본국으로 귀국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사정 이야기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학교에 교수로 남고싶은 마음의 여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일원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음인지 이렇게 대답을 했다.
"예,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건 제게 최고의 바램이 되겠습니다!"
"미스터 리, 잘 알았소!"
이런 일이 있은지 반년후 일원이는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정치학교수로 임용되었다.
이 일이야말로 일원이에게는 마치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웅비하는 순간이 되었고 무한한 영예로 감동되는 순간이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박사의 온 가족은 여차여차하게 영국 런던으로 이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추월이는 추월이로 하여금 "수만리릃 날게 해주겠다"는 일원이의 약속이 허황한 것이 아닌 실제가 되었음을 비행기상에서 새삼스럽게 감지하면서 연상 무한히 기뻐해했다. 오죽이나 한 가족 모두가 기뻐했으랴!
이후 이일원박사는 이 대학에서 평생 교수가 되어 오랜 동안 "정열적인 교수"로 일컬어지는 유명교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이박사는 영국은 물론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국가들에 저명한 국제정치학 교수로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국외의 많은 강의와 더불어 국제정치학지에도 여러 편의 눈부신 논문이 개재되게 된 것이었다. 이일원박사는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보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서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이 공헌한 세계인사가 된 것이다.
이박사는 런던의 대학교수로 임용된 첫해에 어느 때쯤 모든 가족들을 영국으로 대려가기 위해 본국에 올 기회가 있었는데 먼저 미국에 들려 닥터 리(숙부 아들 이경수-경영학박사 )를 반가히 만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뜻있는 며칠을 보내고 나서 다시 본국에 온 닥터 리는 숙부, 포항 소장, 서울 소장 가족들을 함께 모와놓고 성대한 잔치를 배설하며 큰 인사를 드렸다. 부모님께는 "대장부답게 살겠다"고 했고, 숙부모님께는 "숙부모님을 닮겠습니다". 그랬다. 그리고 두 소장에게는 "영원히 잊지 않을 숙부들"이라고 했다.
이박사는 이 길로 부모와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고금도 처가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박사부부는 공부산 바위 위에 함께 올랐다. 고금도에 온 것은 공부산에 꼭 가야한다는 일원이 나름 대로의 깊은 뜻이 있었다. 일원이 부부에게는 정말로 감회어린 자리였다. 일원이에게는 정말로 부엉이가 아닌 공부 자체였었다. 다 이루었고 승리를 확인한 후의 공부산 자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깨를 펴고 손을 흔들면서 이렇게 외쳤다. "공부산아,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고!" 그랬다.
이런 다음 이박사가 옛 버릇 따라 무심코 자기가 살던 동네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자기가 살았던 옹색스럽던 그 옛 집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곳은 작은 밭으로 변해있는 것이었다. 한 편 이박사가 청년시절에 열심을 기울여 개간했던 그 넓은 땅은 여전히 옥토밭이 되어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바라보는 이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고금도 고향을 위한 나의 마지막 보람이 될줄이야!. 그래, 늘 발전해야지. 더 낫게 변해가야지. 국제정치문제도 그래야지! 이젠 국제문제에도 어느 누군가가 뛰어들어야 만 하는 것이야!"
이렇게 해서 이박사 부부가 조용한 산책길을 가만가만 천천히 내려올 무렵 어느 소년에게서 뜻밖에 급한 전갈이 왔다. 이 고을에서 이박사 가족을 위한 환영 파티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박사의 온 가족이 이 파티에 참석하게 되어졌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초등학교 졸업반에서 2등을 했던 여영환을 만날 수 있었으니 꿈만 같은 반가운 일이었다.
"일원아, 네가 크게 성공을 했구나! 장하다! 장해! 축하한다!"
"오, 영환아, 반갑구나! 반갑다! 지금 여기서 널 만나게 되다니. 넌 지금 어디 사느냐?"
"육지 가까운 중학교에 있어. 오늘 고향 들렸다가 이렇게 만났구나! 자, 일원아, 식사를 좀 차렸다. 식사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 좀 나누자!"
그러니, 그러자!"
영환이가 일어나서 말했다.
"여기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일원박사로 말하면 우리 고금도명사이시며 현재 영국 런던대학 국제정치학교수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이박사는 우리 고금도가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박사는 어쩌면 어르신들의 기쁨이요 우리의 선후배요 어릴적 친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는 우리 고금도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이박사께서 잠시 말씀주시겠습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요!" 하면서 여영환이가 박수를 크게 치기 시작했다.
이때 이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먼저 영환형님의 과분한 말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먼저 말씀 드리고싶은 것은 너무나 반갑다는 것입니다. 어르신, 선배, 친구, 그리고 후배, 여러분! 영환형님이 저더러 '고금도명사'라고 그러셨는데 진정 아닙니다. '고금도명사'는 영환형님, 그리고 여러분 모두이십니다! 저는 토요일에 예배하는 기독교 신자(이박사가 언제나 즐겨 쓰는 말법)인 것과 국제정치학을 조금 공부했다는 것 밖에는 아무런 달라진 것이 없는 '일원'짜리입니다.
그런데, 제가 꼭 밝히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새장'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 말은 우리 고금도가 새장이라는 말이 아니라 저의 공부할 수 없었던 답답하고도 열악한 환경을 탓하여 일컸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고금도에서는 가난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해서 그 새장에 갇혀있는 이름 모를 슬픈 소년소녀들이 많이 있을 터인데 이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슬퍼져서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이박사가 말한 다음 한참동안 말을 그만 더 잇지 못하고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앉아있던 그의 부인이신 추월여사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 손수건 있어요! 여보!"(끝)
(다음은 실화단편소설/ "도망자"(escapee) 를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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