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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12} 문학의 길 재정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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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나다의 뱀프에서 곤돌라를 타고서 한참 올라가 정상에 이르면 앞에 솟아있는 여러 개의 만년설의 준봉들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문학의 정상이라면 이상스럽게도 이 최 정상에 100% 오른 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다만 톨스토이나 쇅스피어도 이 준봉에 오르고자 했을 뿐이다. 영롱한 문학의 준봉은 하나님 안에 아직도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직도 현대의 문학도들은 그것을 찾고 또 찾아 나서서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즐거워서일까? 아니면 부득히한 사정일까? 또 아니면 모종의 영예를 탐한 것일까?

   문학은 평지에 섰을 때가 중요하며 올라가면서 계속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다 문학이기 때문이다. 산을 올라가는 과정이 중요할 때 준봉의 경험도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문학의 길, 신앙의 길은 항상 재정검하기가 중요해진다. 문학이란 마음이 가난하고 맑아야 좋은 글을 쓰기 때문이다. 척하는 문학글은 속내가 내비쳐  진짜가 안보이고 잘 나타나 보여지질 않기 때문이다. 항상 가난하게 평지에서 생각해 보자. 곤돌라를 타고 어느만치 올라가더래도 가난해 하자. 그렇게 수련하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부터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 이다. 그래서 다시 준봉에 올라보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문학이라는 세가지 정의가 있다.

   첫째, "문학"이란 글에 대한(관한) 학문이다.

   옛날로 돌아간 원시적에는 먼저 "무"가 발달했고 "무"가 더 중요했다. 그러다가 점차 인지가 발달해 갈수록 늦동이 "문"이 우후죽순처럼 자라고 커나 중요해지더니 나중에는 "문"이 안방찾이를 하고 "문무"순위가 되었을뿐 아니라 "무"가 마치 "문"을 지키거나 "문"이 "무"를 부려먹기까지 하는데 이르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이리하여 이런 역사발전 과정에서 온 세계는 오랜동안 부득불 "글에 대한 모든 학문, 글에 관한 모든 학문이 '문학'이다." 라고 정의했다.

   둘째, 인지의 계속적이고도 지속적인 발달을 따라 세분화 되면서 질서를 찾아야 했다. "문학"이란 자연과학 및 정치, 법률, 경제, 등에 관한 학문 이외의 모든 학문을 가리켜 "문학"이라고 하였다. 곧, "문학"이란 순문학, 사학, 철학, 사회학, 언어학, 등을 일컸었다. 아마도 이런 시기란 크게는 18-19세기 이후로부터 점차적이었으며 지금도 학문적인 분야에서 그렇게 분류되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셋째, "문학"이란 글과 말로 이루어진 정신사상 예술이다. 

   이것이 오랜 세월동안 탐색하여 찾아진 적중한 "문학"의 정의가 아닐까. 문학은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이란 사람의 정서와 사상을 사상의 힘을 빌려 언어 또는 문자로써 표현하는 정신 예술이다.

   이리하여 건축, 회화, 조각, 예술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처럼 글과 말로 이루어진 문학은 종교와 더불어 사람의 내적 감동과 환희와 더 깊은 사상을 표출하는 신비스러움까지를 보여준다라고 인정하는 학문이 곧 "문학"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라는 오늘날 이 시대에 말해지는 "문학"이란 것과 우리가 여기서 말해지는 "재림문학"이란 것은 바로 이 세번째에 국한한 "예술문학"을 일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의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사람이 왜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을 하는 것일까? 또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면 좋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뉴앙스 섞인 질문이다. 

 

  

   왜 문학을 하는 것일까? 문학을 하면 좋은 것일까?

 

   사실 알고보면 사람이란 사람 자체가 문학적인 존재이다, 라는 점이다. 문학적이신 분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왜 그러한지 바로 그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볼 필요가 있어진다.

   문학의 실체는 상징적(symbolical)인 표현체이며 상상(imagination)이라는 이미지 표현체인 것이다.

   문학은 직접 육안으로 보는 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상상하며 볼 수 있는,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는 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하는 이들에게는 상상력(imagination)이란 게 그렇게 중요하고 풍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세계에 있어서 이런 실체화 되는 상상의 세계를 향유하며 눈에 돋보이게 실체화 되는 글로 탄생시키고 나타내는 내재적인 가치체현이란  참으로 인생의 정신적인 보람이 되고 행복해지기 그지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문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나 기대를 바라지 않는 순수세계의 체험을 두고 하는 표현이다. 이건 군살이 없는 그것 자체가 참 행복인 것이다. 그래서 "순수문학"이란 용어가 탄생했는데 이 말 자체가 문학다운 문학에 대한  방어적인 성격이 있다. 이것은 넓게는 세상의 것이 섞일 수 없는 것을 이름한다. 그리고 이건 본질적으로 만인 속에 흐르고 있는 내재성이다.

   여기서 진일보 해 보자. 문학과 종교는 둘 다 내면 세계의 것이다. 추구하는 성격과 내용들이 본질적으로 흡사하다. 그래서 문학이 종교를, 종교가 문학을 서로 힘입고 조화(harmony)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오누이 좋고 누구 좋다는 금상첨화가 되는 격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바울을 문학하는 2대 문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윗은 시문학, 바울은 비평문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들은 누구나 시편이나 바울의 서신 중에서 노출된 문학으로 보편적으로 감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시 다윗과 바울은 남이 알지 못하는 행복의 폭이 더 컸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 보태기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성경의 문학을 문학에다만 과잉점수를 주려고 하는 시도는 문학에다만 집착하는 잘못이 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성서적인 면에서 볼 때는 그것 자체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맥락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나는 결론은 그들의 글들이 문학의 관점으로 보기 보다는 그들이 계시를 받았다는 관점에다 역점을 먼저 두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만 성서적이 된다.  그래서 성경을 문학적인 시야로 살필 때에라도 성경에 나타난 문학을 가리켜  "계시문학"이라고 말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문학성이 많은 이들을 택해서 계시를 준 것 같다는 해석이다.   

폐일언코 오늘날도 그래서 문학이 종교를, 종교가 문학을 힘입을 수만 있다면, 신앙이 문학을 문학이 신앙을 힘입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윗과 바울처럼 문학으로의 신앙사상과 기별전파의 매개체로써의 사명까지를 스스로 감당케 되어지는 일에 유익할 것이다. 따라서 신앙문학 하는 그 보람이란 두 말 할 것 없이 엄청난 정신적이고도 영적인 위력(영력)을 갖게 되어질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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