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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신인상 당선} 정지된 시간 / 송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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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 소감>

 

교회에서 감사헌금과 과정공부를 위한 축도가 있었다.

‘재림문학’ 임원께서 "어찌 알고 감사헌금이냐?"고 하셨다.

감을 못 잡아 “무슨 말씀이신지요?”라고 되물었다.

집에 가 e-mail을 열어보면 알 것이라고 하셨다.

아이들 다 자라 떠나보내고 허탈감에 허우적댈 때 내 삶의 돌파구였던 수필,

부족한 내게 살아갈 존재감의 기회를 잡혀주신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학교 다닐 때 글짓기대회에서 작은 상을 받아보고 몇 십 년만의 귀한 상!

너무 기쁜 탓일까? 속살을 들켜버린 여인네마냥 부끄러움이 앞서 얼굴 붉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 생일을 맞아 감사표시를 한 것이었는데......

미리 마련해주신 내 생애 최고의 생일선물 정말 감사합니다. (송선주)  


정지된 시간 / 송선주     


   딸아이가 결혼을 했다. 구박 십일 동안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서 머문 것은 고작 하루뿐.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일정이 그리도 급한가. 하나님의 용병이 되어 의료선교를 떠나는 신랑을 따라 멀고 먼 외딴 오지 섬으로 가 버렸다. 일 년 후에 다시 오마하고.

   ‘대한의 건아들은 의무적으로 군 입대를 해야 한다. 주체 할 수 없이 끓는 젊음을 꾹꾹 누르며 나라의 용병이 되어 헌신 봉사한다.’ 딸아이의 의료선교 봉사 정신도 군 복무와 다르지 않았나보다. 하지만 삼십년 가까이 곁에 두고 대둑이고 때론 친구 같이 살아왔던 그 세월이 일시에 멈춰 버려 무중력세상처럼 허허롭다.

   딸아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집안 구석구석 흩어져 있는 일상용품들을 하나하나 거두어 보물인양 제자리에 넣어둔다. 벽면에 걸려 있던 사진들을 결혼사진들로 바꿔본다. 너무도 화사하게 웃고 있는 저 두 사람의 미소가 마주보며 한 평생 변함없길 기원하면서.... 딸아이의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컴퓨터를 켠다. 아들이 대신 담아두고 간 결혼사진을 클릭하고 그날의 순간순간 장면들을 들려다본다.

   함박웃음을 웃으며 축하해주는 낮 익은 얼굴들. 신랑 신부 입장을 알리는 개구쟁이 꼬마들의 요란스런 종소리, 꽃바구니를 들고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작은 숙녀들의 꽃잎을 뿌리는 앙증스러운 손놀림, 모든 장면 장면들이 두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기에 더욱 가슴이 벅차다. 이젠 둘만의 둥지를 틀어 서로를 맞추어가며 세상과도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워가겠지.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격어가면서.

  불현듯 지난 일들이 차창 밖 풍경처럼 스친다. 우리부부는 참 오랜 세월동안 떨어져 지냈다. 결혼 후 남편은 첫 아이를 낳은 나를 시골 시댁에 맡겨두고 해외로 떠나갔다. 세살 터울 둘째가 나고 남편은 미국에 정착해야 한다고 또 떠났다. 아들이 세 살 때 쯤 "엄마! 아빠가 뭐야?" 물었다. 동네 또래 아이들이 아빠아빠 부르는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때를 떠 올리면 가슴 안이 아려지고 아이에게 미안하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러 큰아이가 아홉 살, 작은아이가 여섯 살 되던 해 봄에 두 아이를 데리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을 눈물로 뒤로 한 채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이 사는 나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거의 십년이란 세월을 시부모님이랑 함께 살았는데 시아버님의 며느리 사랑은 지극하셨다. 아마 혼자 사는 며느리가 안쓰러워서 더욱 그러셨으리라. 우리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보살펴주심과 사랑으로 잘 자랐다. 그래서 인지 지금도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좋아한다.

  우린 새로운 세계에서 제2의 고향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위를 보면 이민 생활에 맞벌이를 해야 그나마 경제적으로 빨리 안정을 찾는데, 남편은 나름대로 먼저 와서 느낀바가 있었던가 보다. 한 부모라도 집에 있어 아이들을 돌보아야 가정이 안정 된다고 믿고 힘들지만 혼자서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대부분 부부가 바깥에서 온 종일 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 없는 텅 빈 집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나가 배회하게 되고 행여 친구들을 잘 못 사겨 문제 청소년들이 되기도 한다. 때론 보호시설에 아이들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다. 또한 생계에 급급해 대화시간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부모는 한국말 아이들은 영어만 하게 되어 부모 자식 사이에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겨도 쉽게 해결 할 수없는 경우가 생겨났다. 남편이 아는 가정들도 그런 일이 더러 있어 자기가 중간에서 통역을 하여 준 일이 있었단다.

   우린 두 아이들을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집에서는 한국말만 쓰게 하고 한글학교도 열심히 보냈다. 우리 형편에 힘들었지만 중학교 때 부터 크리스찬-스쿨도 보냈다. 그래도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적응력이 빨랐다. 이민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학교 큰 아이 선생님이 아이에게 "네 동생은 말을 빨리 배우는데 넌 왜 말을 안 하냐?"고 했던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나. 행여 발음을 잘못하여 망신이나 당할까봐 소심한 마음에 그랬으리라. 나무도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처음 한동안은 몸살을 앓듯이 우리 아이들도 그랬다. 어느새 어엿한 직장인이 된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남편은 직장 다니는 딸에게 집에 오면 엄마 부엌일 도우라고 닦달 거렸다. 그래야 시집가서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종일 일하고 피곤이 저려있는 아이가 가엽지도 않느냐며, 당하면 다 하게 된다고 남편이랑 다투기도 했다. 그러던 딸이 착한 신랑을 만나 결혼해서 떠났다. 친인척이라곤 아무도 없는 이국 땅, 그나마 말벗이 돼주던 딸아이가 떠난 자리는 너무도 크다. 금세라도 차에서 내려 "엄마!" 하고 집으로 들어 올 것 같은 마음에 밖을 기웃거렸다. 때론 가로등 불빛을 세며 서성이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선교지에서 사귄 새 친구들을 불러 식사를 했다고, 알록달록 먹음직한 음식들이 가득한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놨다. 제 신랑과 함께 활짝 웃는 모습도. "엄마! 이 음식 내가 다 만들었어. 대단하지?  엄마 딸” 이라고 쓴 글과 함께. 오늘도 나는 딸아이 책상 앞에 앉아 창 너머로 비쳐오는 고운 햇살에 그리움으로 시린 마음을 데운다. 정지된 시간들을 되찾을 수 있는 그날을 손꼽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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