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신인상당선} 원산에서 누님과의 3박4일 / 방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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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문 신인상}
<당선소감>
우선, ‘신인 발굴’사업을 만들어 나에게도 마음에 느낌을 글로 옮길 수 있는 용기와 기회를 주신 미주재림문인협회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당선소식을 받은 즉시 중국선교여정을 끝내고 귀국길에 있는 목사님께 나의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아프리카 8년간의 오지생활로 WHO본부로 부터 공로상을 받을 때 보다 더 기쁘다고’. 나파 마을교회 교우들에게는 당선된 내 글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면서, 그 옛날 유대나라 임금님들만큼은 못해도 신앙생활의 부분만이라도 감사의 시와 찬양의 글로 함께 만들어가자고 권고해 볼 생각이다. 마음을 글로 옮기다 보면 더 선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이유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으로 믿기 때문에서이다. (방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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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신인상 당선작}
원산에서 누님과의 3박4일 / 방용호
1992년 11월 20일 아침 8시 평양에서 평강으로 가는 밤 열차에서 내가 안내원 신 동무와 함께 내릴 때 원산 역에는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눈이 내렸다. 그 기나긴 세월 소식조차 알 수 없었던 누님이 꽃을 든 손녀딸과 함께 나를 맞아 주웠다. 이 순간을 위해 42년간을 참고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할머니가 된 누님과 나는 서로 껴안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원산에서 잠시 쉬고 있는 기관차도 함께 온 손님들도 우리 남매의 만남을 조용히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그 옛날 매형이 그렇게 사랑했던 누님의 아름답던 그 예쁜 얼굴, 작고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우리 형제에게 늘 웃어 주시던 얼굴, 고달픈 삶에 지친 주름진 얼굴, 근심의 긴긴 밤들을 참으며 오늘을 기다려 주신 얼굴 그리고 죽은 줄만 믿었던 동생이 이렇게 살아서 의젓하게 찾아온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누님의 얼굴을 나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한참 동안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이렇게 누님을 다시 만난 것은 꼭 보름이 모자라는 42년만이었다. 그러니까 1950년 겨울 원산부두에서 철수하는 LST를 기다렸으나 기회를 못 잡은 나에게 주먹밥을 주시면서 ‘어디 가서든지 살아만 있어라’는 누님의 부탁을 듣고 집을 나선 날이 바로 12월 5일 저녁시간이었다. 그 긴 42년이란 세월, 이 고향땅에서 나를 희미하게나마 살아있을 것으로 믿고 기다려 주신 누님이시다. 오후 평강에서 동생부부가 와서, 세 남매가 생전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살아 있음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의 둘째 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따뜻한 겨울 날씨였다. 강원도 도청안내원 정동무가 준비한 차편으로 우리 형제는 누님을 모시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 떠났다. 나의 고향은 원산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작은 농촌으로, 뒤에는 황덕산과 마을 앞에는 야태강이 동해로 흐른다. 출가한 누님이 친정에 올 때면 원산에서 기차를 타고 문평 역에서 내려 시오리 길을 걷다보면, 그 긴 여름의 하루가 걸리던 길을 우리는 한 시간도 안 걸려 찾아왔다.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겨울을 기다리는 골짜기에는, 예전처럼 뒷산에서 시작한 맑은 물줄기가 뒤를 따라붙는 겨울철도 모르는 채 한가하게 흐르고 있었다. 냇가를 따라 마을에 들어가면 뽕나무들이 줄줄이 서 있었는데, 내가 삼촌댁에 얹혀 살 때 누에를 치기위해 뽕잎을 따던 곳이다. 뽕나무밭 밑에 있는 빨래터에서는 그 옛날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조실부모한 나의 박복한 이야기들을 주저 없이 주고받던 곳이기도 하다.
시내를 끼고 양쪽 언덕에 제멋대로 서있었던 초가집들은 모두 기와집으로 변했으나 집들 사이에 서 있는 감나무들이 잎을 모두 잃은 탓인지 유난히도 쓸쓸하게 보였다. 그 옛날 저 집들에서 살던 사람들은 우리 모자를 불쌍히 여기고 간장된장까지 나눠 주시던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름지기 그들도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면 나처럼 고향을 떠난 떠돌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의 삶에 깊이 수놓아진 이 마을의 옛 사연들은 아랑곳없이 정동무의 차는 내가 한때 숙부님과 함께 농사를 짓던 천수답을 지나 아버지가 개간하시다 작고하신 과수원에 도착했다. 그 과수원 입구 왼편 언덕에는 남쪽을 향한 아버지묘소가 있었고 중심부에는 5째 삼촌이 우리 모자를 위해 지어주신 초가삼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초가집도 아버지의 묘소도 그리고 키가 크고 작은 과일 나무들까지도, 그 옛날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묘는 오래전에 과수원 가운데 이장되어, 지금은 다행히도 어머니와 함께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었으나 묘석도 묘비도 없었다. 나는 누님의 양해를 얻어 먼저 어머님의 묘전에 한 걸음 더 다가서서 머리를 숙였으나, 불효자식이 이제야 찾아오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조차도 못하고 꽃을 든 채 마냥 서있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탓으로 할 말 모두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도 싶어지니 더 어이가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더 짧았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더욱 그러했다. 나를 따라 누님도 동생도 아무런 말도 없이 묘전에 마냥 앉아서 하늘과 땅을 차례로 쳐다보다가, 약속한 시간 모두를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얼마나 고대하고 마음 설레며 기다려온 이 시간이었는데!
셋째 날은 누님대신 누님의 외아들 덕남이와 함께 시내관광을 했다. 42년 전 LST를 타기 위해 피난민들이 운집했던 원산부두, 명석동 언덕에 동해를 향해 서있는 아파트 건물들, 전쟁의 상처에서 아직 회복 못한 송도원 해수욕장, 매형이 경영하던 자전거점포가 있었던 중앙로 등등이 나의 희미한 기억들을 되살려주웠다.
오후에는 5째 숙모님의 식구들, 문천에서 둘째 숙부님의 자녀들 그리고 원산근교에서 사는 누님의 세 딸 식구들의 방문을 맞이했다. 안방에 자리를 잡은 숙모님과 우리 형제를 제외하고는 마루에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이 식구들은 모두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혈연의 탓이리라!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즐겁게 해 주는지는 알 수 없어도 웃음과 대화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들은 나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정치적인 질문을 하지 않아서 기분이 더욱 좋았다. 그들이 그토록 성숙해서가 아니라면 두 안내원이 그렇게 주의를 시킨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두 안내원 동무는 ‘박사님 편히 쉬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누님은 나에게 오늘 도착한 모두에게 내가 그간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려주었으면 했다. 그들에게는 죽었다고 믿었던 내가 이렇게 살아 있고, 더욱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빈손으로 월남한 내가 숙부님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여 미국유학까지 하고 미국시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 등등 궁금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밤 우리 세 남매가 나눈 이야기들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WHO의 일로 아프리카와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26년간 지내면서, 기회가 있을 적마다 북조선관리들을 개인적으로 도와준 탓으로 내가 그간 두 안내원들로부터 이렇게 각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까지도 들려주었다.
밤이 깊어, 나는 숙모님과 마주 앉아 월남하여 난민생활을 하시다 작고하신 숙부님의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그렇게 아름답던 숙모님도 기다리는 긴 세월에 못 이겨 어느덧 할머니로 변했고, 얼굴에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숙부님을 남으로 떠나보내시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어린 남매를 데리고 이곳저곳에 옮겨 다니시다가 수년전에 천내리 무연탄 탄광에서 일하는 아들을 찾아와 함께 사신다는 것이다.
나는 숙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숙부님께서는 통일이 되면 즉시 고향으로 돌아오시기 위해 휴전선 가까운 속초에서 그 날을 기다렸으나, 그 소원이 휴전협정으로 외면을 당하자 새 가정을 이루고 사시다 한 해전, 69세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잠시 피신하기위해 집을 떠난 남편은 남한에서 새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낳아 사시다 먼저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숙모님의 허탈한 그 마음을 무엇으로 어떻게 이해 할 수가 있겠는가?
동족끼리 벌인 전쟁은 분명히 민족적인 치욕이기에 누구도 용서될 수도 용서할 수도 없거니와 누구에게 원망 할 수도 없는 기구한 운명들임에 틀림이 없다. 숨 쉬는 목숨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용서 못할 지난날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맡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는 숙모님의 얼굴을 몇 번이고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이해를 갈망했다. 이렇게 원산에서의 나의 마지막 날 밤은 기쁘고도 슬픈 시간들이었다.
나흘째 날은 나에게 허락된 누님과의 마지막 날이자 누님의 70세 생일잔치가 펼쳐지는 날이었다. 사실 누님의 생일은 양력으로 11월 11일이었으나 미국에서 동생이 온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새로 정한 날이 공교롭게도 내가 누님을 방문하는 마지막 날이 된 것이다. 조반 후, 누님의 사위 셋과 신동무가 두 시간이나 걸려 생일상을 차렸다. 잔칫상 중간에 크게 자리 잡은 문어를 중심으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담은 여러 접시가 두 개씩 대칭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이 큰상 뒤에 회색 치마저고리를 입으시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 아들부부로부터 큰 절과 술잔을 받는 누님은 오늘을 위해 사신 것처럼 행복하게만 보였다. 신동무의 안내에 따라 내가 두 번째에 이어 동생부부와 사촌들, 누님의 세 딸과 가족들이 나이 순서대로, 그리고 나의 사촌들과 오촌에 이르기 까지 누님의 만수무강을 위해 큰 절을 올렸다. 잔칫상은 곧 점심상으로 그리고 축하연으로 이어져, 너나 할 것 없이 축하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작별의 시간은 사정없이 찾아와 안내원의 계획대로 먼 곳에서 온 친척들부터 한 가족씩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두 안내원도 기차시간을 맞춰서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아파트를 떠나고, 지난 며칠 동안 하루 세끼씩 20여명의 음식을 무연탄 불로 만들어낸 이집 며느리의 부엌도 조용해 졌다.
나는 짐을 챙긴 후 누님 곁에 누워 작별이야기를 나누었다. 누님은 내 처가 보내온 털신, 오리털로 만든 침낭 그리고 태엽으로 밥 주는 손목시계를 두고두고 잘 쓰겠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대신 고마움을 전해 달라고 하셨다. 내 가족사진을 다시 꺼내어 보시기에, 누님께서는 내 식구들이 사는 미국에 오시게 되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한 피를 나눈 형제의 만남은 누구도 방해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누님의 두 손을 잡는 순간, 내 가슴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라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이 스쳐 갔다. 다시 만난다는 기약은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도 같은 것이기에, 나는 누님께 내년 봄 버드나무 두 그루를 아파트 뒤뜰에 심어 달라고 부탁 했다. 가지들이 자라서 그늘을 만들면 누님이 이웃들과 함께 그곳에서 여름날을 지내면서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 이 동생을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원산의 하루를 마감하는 겨울 해와 함께 평양으로 가는 열차도 출발한다는 기적을 울리자, 나는 누님과의 약속대로 웃는 얼굴로 ‘누님 아무쪼록 건강히 계세요’ 라고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기차에 올랐다. 누님은 큰 소리로 ‘방동무, 우리 조국을 다시 방문해 주시요’ 하면서 손을 흔들며 나를 기쁘게 떠나도록 웃어 주셨다.
서둘러 떠나는 열차의 창밖으로부터 내 눈에 비쳐지는 온갖 것들은 오직 만남이란 생각뿐이었다. 즐거움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는 그리움이라는 속성(屬性)이 있기에 하나님은 만남이라는 선물도 함께 주신 것이다. 고로 만남은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必然的)인 천륜(天倫)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세상 사람들은 얼굴과 얼굴, 눈과 눈 그리고 입술과 입술을 맞추어 가면서 마음을 나누면서 산다. 그런데 왜 내 고향 한반도에는 혈육의 만남까지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내 누님은 그 버드나무 그늘 밑에서 다시 만날 날이 오기를 일곱 번의 여름을 기다리시고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나는 수개월 후에야 인편을 통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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