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시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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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강위덕
태초이전에
창조주는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그림자 本으로 사람을 만들었던 게야
인간이 땅위에 설 때 그림자는 이미 거기에 있었어
그것은 위대한 힘으로 인간을 떠받히고 있어
사람은 그림자의 힘으로 사는 것이고
조물주도 그것 없이는 외로웠던 게야
누군가가 이 그림자를 밟고 지나가면
밟힘이 대지가 되고 대지는 삶이 되는 것이야
그러므로 삶의 제공자는 그림자일 것이고
원형은 분명 하늘인 게야
어두움을 봐
그곳에는 그림자가 없잖아
시와 시인의 말
사르트르는 내가 있음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논리를 휴머니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말함으로 안티-휴머니즘을 주장하였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철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존주의의 토대가 된 사르트르(Sartre 1905-80)의 말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영어도 알고 또한 한국어도 잘하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대단한 수준의 지성인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만치 그 말 속에는 심오함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은, 본질에 앞서간다는 말이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면
이렇게 다시 한 번 설명을 하여 보겠습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큰소리를 벌컥 지르면서,
다른 사람을 내리쳤는데, 바로 그 다음의 순간에
자기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일어나면서, 내 본심은 그렇지 않았는데...” 하였던 경험이 있습니까?
바로 이와 같이 어떤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원래부터 그와 같은 행위를 하게끔 본질적으로 정(定)해져 있어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의 상황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것보다,
앞서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선(善)과 악(惡)이 50%와 50%의 비율로 정확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한면과 악한면이 함께 들어 있으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그 비율이 변화되고 있는 셈이고 항상 선과 악이 서로서로 싸우고 있는 셈이다.
선이 더 많아지면, 선한 쪽으로 기울어져서 선한 일을 하게 되고,
악이 더 많아지면 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는 항상 그림자가 따라 다닙니다.
슬적슬적 스쳐지나가는 그림자의 뒤에는
항상 진실한 현실이 묻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쁜 행위의 그림자가 있고 어떤경우엔 좋은 행위의 진실이 그림자의 배경에 숨어 있습니다.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의 3차에 걸친 남극탐험,
그 중에서도 제 2차탐험(1914~17)에 얽힌 이야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설입니다.
탐사선 인듀어런스호가 1915년 웨들해에서 부빙(浮氷)에 갇힌 채 10개월간 표류하다
결국 죄어오는 얼음의 압박으로 난파하자,
섀클턴과 27명의 대원들은 부빙 위에 텐트를 치고 다시 5개월을 더 버팁니다.
그들은 79일 동안 해도 없는 남극의 겨울 혹한을 이겨내며,
식량이 바닥나자 물개기름으로 연명합니다.
그들은 난파된 배의 잔해와 구명보트로 세척의 배를 만들고,
텐트를 찢어 돛을 달아 다시 남극바다에 도전, 27명이 모두 생환되는 집단생존의 신화를 남깁니다.
추위, 배고픔, 향수 그리고 ‘절망’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한편의 감동 드라마이자 인간 승리였습니다.
일행이 마지막 남은 비스킷 조각을 나눠 배낭에 챙겼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한밤 중에 눈을 뜬 섀클턴은 텐트 속에서 희뿌연 그림자 하나가 몸을 일으키더니
부스럭거리며 옆 동료의 배낭에 손을 넣고 있었습니다.
섀클턴은 그런 극한상황에서도 동료의 비스킷에 손을 대는 파렴치한 대원을 보며
속으로 탄식하며 분을 삭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훔치는 게 아니라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동료의 배낭에
자기의 금쪽보다 훨씬 귀중한 마지막 비스킷을 슬그머니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숭고한 행위가 바로 27명 대원 전원이 생환되는 인간정신입니다.
이 혼탁하고 극도의 혼란 속에 곤두박질치는 세상,
이에 못지 않게 깨지고 쪼개지는 상처투성이의 현실을 바라보며,
작은 비스킷 한 쪽이라도 나누는 정신이 우리에게 요긴함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이 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바코드 되어가는 삶의 현상을 그림자로 표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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