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구두 속에 들어간 자동차 키 / 고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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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건망증이 더 심해진다고 한다. 일상에서 건망증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나이 탓이라 하더라도 의식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망각증세는 더 큰 걱정일 수가 있다. 기억해 두어야 할 대의명분은 헌 신짝처럼 잊어지고 개인의 손익에 관한 일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진다. 섭섭한 일을 당한 감정은 죽어도 잊히지가 않고 감사함을 표해야 할 이성적 결단은 아침 이슬의 사라짐 같이 잊힌다. 일상 중에 오는 건망증은 준비와 연습으로 줄여 가고 영혼을 해하도록 까지 쌓여 오는 망각증세는 독서와 명상으로 자기 성찰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이른 아침 커피를 준비하는 일은 내 몫이다. 필터를 끼우고 커피 빈 세 스푼을 넣고 물 네 컵을 부은 후 스위치만 누르면 끝이다. 그 날도 그렇게 하고 잠시 후 돌아와 보니 온통 커피 가루가 지천으로 흩어져 있다. 필터 끼우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청소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그 아침은 우울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 병원 문을 단단히 잠그고 30여 분 자동차를 운전하면 집에 당도한다. 거의 다 집에 왔는데 불안한 생각이 든다. 내가 전기불과 에어콘을 끄고 왔는지 확실치가 않다. 종종 다음 날 아침까지도 불을 밝히고 에어콘이 돌아간 일들이 있어서이다. 한 달에 몇 번만 그러고 나면 전기 고지서에 액수가 달라진다. 차를 돌려 병원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확인하는데 대개의 경우는 잘 꺼져 있는 것이다.
건망증에 대한 두려움이 불쑥거려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다. 어떤 부인은 심지어 통화 후 전화기를 냉장고에 넣고 하루 종일 전화기를 찾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얼마 전 내 차의 키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차를 쓰고 왔는데 그 다음부터 키가 없다. 온 방을 뒤져도 찾지 못했다. 한 달여 후에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던 아내가 웃으며 키를 내 놓았다. 키는 그 구두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 칼럼을 읽는 독자라며 날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군대 동기생 함부형이라는 것이었다. 내 이름과 군대 복무처가 칼럼에서 확인된 후 더 기다릴 수 없어 당장 전화했단다. 제대 후 41년 만이기 때문이다. 흰 머리를 쓸어 올린 후 "너 나한테 반말하면 사람들이 욕하겠다." 라며 내 모습을 부러워하는 그에게서 젊은 보라매의 옛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기억할 수밖에 없어야 할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빨리 떠오르지 않아 민망했다. 제대 후 긴 세월을 그들을 잊고 이민 생활에 몰두했기 때문이라 자위했다. 동기생들은 기억에 곧 돌아왔으나 선후 동료들은 며칠 후에야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환자들이 진료 예약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망증이다. 사실일 수도 있고 핑계일 수도 있다. 예약 카드를 써 주고 미리 전화를 해 주어도 잊어 버렸단다. 진료를 거부하는 투쟁까지 하며 여러 환자들의 못된 습관을 고쳐 주기도 한다. 밤을 지새우던 통증을 해결해 주고 나면 후속 진료에 나타나지 않는 통증 건망증도 있다. 빨리 괴로움을 잊고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는가 보다. 그러다 병을 키워 치아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니 이 경우에 건망증은 필요악인가 보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잘 분별할 수만 있다면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잊어야 할 것을 잊는 것은 빠를수록 좋겠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은 오래일수록 좋겠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비록 구두 속에 열쇠를 넣고 한 달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마음에는 은혜와 감사를 매일 새롭게 하고 원한과 섭섭함에 대해서는 건망증에 걸려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역임
수필집: 미완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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