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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바람이 있으매 / 이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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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있으매 / 이연희

 

                                           

   바람소리에 잠에서 눈을 떴다. 닫힌 커튼 사이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는 나무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벌떡 일어나 나도 나무들처럼 바쁘게 움직여서 아침에 할 일들을 대충 끝냈는데, 나의 늦잠을 깨운 고마운 바람은 지금 어디 갔을까. 오늘 아침은 갈 곳이 많아서 바쁜가보다. 바람은 간데없고 율동을 끝낸 나무 가지에서 새들의 합창과 더불어 생동감 넘치는 아침이 열렸다.

   딸 가족과 함께 바닷가에 온지 삼일 째다. 바닷가 집에 올 때는 언제나 가난한 살림살이 이사하는 양 올망졸망 챙길 짐들이 많다. 아이들이 있어서 더욱 그렇다. 모두들 필요한 것과 좋아 하는 것들을 챙기니까. 딸아이도 덩달아서 식사 메뉴에 필요한 것들을 빠칠세라 꼼꼼히 챙겼다. 우리 모두는 놀기 바빠서 점심은 주로 과일로 때우고 아침저녁은 제법 격식을 차려 먹었다.

   어제는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연을 날리러 갔었다. 크고 아름다운 가오리연은 웬일인지 띄우기만 하면 곧 바로 머리를 모래위에 처박기 일쑤였다. 도무지 뜨지 않는 연을 띄우려 안간힘을 쓰는 할아버지 보다 구경하는 아이들이 더 맥없어 했다. 아이들은 조개껍질을 주우며 물놀이를 하면서도 연을 띄우고 싶은 마음을 접지 못해 마냥 아쉬워했다. 할아버지는 "바람이 연을 시샘하니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말씀으로 체면치레를 하며 내일을 약속했다.

   아직도 해가 한창인 바닷바람을 즐기면서 나는 홀로 백사장을 맨발로 걷다말고 옛날 고향 향수에 아련히 젖어들었다. 그곳엔 바다는 없지만 맑고 긴 강이 있었다. 봄가을에 학교 갈 때는 가방은 어깨에 메고 신은 벗어들고 치마는 팔과 손으로 거머쥐고 맨발로 강을 건넜다. 여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니고 겨울에는 마을에서 놓은 다리위로 건너 다녔다. 바람 부는 날 작은 나룻배로 강을 건너려면 배가 혹시나 뒤집힐 까봐 무섭기는 했지만 사공아저씨를 믿고 조용히 배에 앉아 있었고 타고 내릴 땐 가만가만 내리고 탔다.

   하지만 겨울에는 좁고 긴 다리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너는 동안 종종 모래 먼지를 얼굴에 뒤집어쓰며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과 싸워야 했다. 바람에 밀려 넘어지는 날엔 강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기에 온 몸에 힘을 주고 한발 한발 바람에 흔들려 균형 잃기 쉬운 발을 내딛으며 힘겨운 몸싸움을 하곤 했다.

   어느 여름날 고개 넘어 콩밭을 매러 가신 엄마가 보고 싶었다. 늘 엄마 말씀에 어깃장만 놓은 미안한 마음에서리라. 물과 이런 저런 것들을 챙겨 바구니에 담아 들고 부지런히 고개를 넘어 갔다. 콩밭에 앉아 밭을 매는 엄마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를 부르는 나에게 공부나 하지 않고 뭐하려 왔느냐는 말씀으로 나를 맞으셨다. 내가 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며 밭고랑에 앉아 풀포기를 잡으니 바람 한 점 없는 열기가 후끈 얼굴을 달궜다. 숨 막히는 시 간은 잠시인데도 길게만 느껴졌다. 등과 얼굴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엄마는 저쪽에서 말이 없고 나는 이쪽에서 말문을 닫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도 더위를 먹은 듯 짧게 우짖었다.

   밭고랑에서 쉬고 있는 작은 방아깨비가 나의 손놀림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날개를 폈지만 멀리 날지도 못했다. 잠자리도 더위를 견디려 쑥 대롱에 앉아 가만히 날개를 접고 있었다. 엄마 말대로 집에서 방학 숙제나 할 것을.... 엄마한테 별 도움도 못되면서 나까지 괜한 고생을 하는가 보다. 울 엄마는 어떻게 이 더위를 여름마다 아니 평생을 견디었을까. 자식들 공부 시키는 보람으로 견디었을까. 가슴이 아리고 목이 멨다. 눈물인지 땀인지 눈이 흐릿하여 앞이 안 보였다.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시원했다. 엄마도 나도 밭고랑에서 일어섰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다가 물 위로 얼굴을 내민 양 숨을 깊이 들이켰다. 시원한 생기에 땀은 씻을 필요도 없이 금세 말라 버렸다. "희야 저쪽 나무 밑으로 물 좀 가져 오렴" 다정하게 말하시는 엄마의 얼굴은 환한 웃음 띤 보름달이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시원한 강바람 산바람은 강과 산에서만 살까? 꽃들이 열매를 맺으려 꽃을 피울 땐 바람은 신이 나서 꽃가루를 운반 하느라 바쁘겠지. 따분한 날엔 바다에 나가 파도를 일으키며 떠가는 배를 잡고 오를락 내릴락 레슬링을 할까?

아니 힘자랑을 하고 싶을 땐 나무를 뽑고 자동차를 넘어뜨리며 집도 날려 보내는 걸까? 역시 바람은 내가 알 수 없는, 나와 전혀 다른 차원의 파워를 지닌 능력인 것 같다.

   벤치에 않아 온통 붉게 물든 수평선을 본다. 바다 속으로 얼굴을 감추는 낙조의 아름답고 황홀한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시원한 바람이 살며시 내 곁에 앉는다. 바람은 내 얼굴에 청량한 바다 향기를 살짝 뿌려주고 바쁘게 일어났다. 저만치에 다소곳이 서 있는 갈대의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받고 간다. 내일 다시 만나자고... 저녁 식사 시간이라며 할머니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빈 소라고둥 속에 맴을 돌았다.

   오늘은 일찍부터 아이들 성화에 할아버지는 바닷가 하얀 모래 위에서 파란 하늘을 휘~이 둘러본다.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듯 한마디씩 묻는다. "할아버지 오늘은 연이 뜰 수 있을까요? 바람이 연을 시샘하지 않을까요?" "글쎄다. 오늘은 바람이 좋은 것 같아. 어디 한 번 띄워 보자꾸나."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연실을 풀었다 당겼다 하는 동안 연은 한 마리 큰 새가 되어 높은 하늘 위에서 바람을 타고 어슥어슥 춤을 췄다. 아이들은 하늘에 뜬 연을 보고 즐거운 함성을 지르며 모래 위에서 겅중거렸다. 하얀 파도는 연신 아이들의 고함 소리를 수평선 너머로 실어 나르고, 바람이 있으매 온종일 우리는 하나가 되어 신바람으로 바람을 맞았다.


미주재림문학 수필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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