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시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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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
강위덕
길이 있었던 것을,
자기 흔적인지 모르고 밟아버린 것들
저 아래 허기진 논바닥
휴지처럼 구겨진 손금 사이에
인연의 고리로 알알이 박혀 있는데
부끄러운 낮보다는 밤을 틈타
손을 뻗어 하늘의 꿈을 감아보지만
해가 뜨면 안개가 걷히듯
이 몽매한 것들 마른 몸으로 귀가하여
도리깨질 한다
도리깨로 그냥 때릴 수 없어
허공을 한번 돌려 치니
구름이 꼬인다
해설
2000년 전 헬라인들은 우주를 3차원의 세계로 인식하였다고 합니다.
3차원은 다름 아닌 길이, 폭, 깊이가 있는 물체로 꽉 차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날 수학자들에 의해 4차원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우주는 0차원 무한대차원까지 모든 정수차원의 세계를 기술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식은 상상력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은 이성적 판단이 허용 할 수 있는 극한의 한계까지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킵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상상력은 이전에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을
의심하고 부정함으로서 무한의 영역, 불가능의 세계, 합리적이라고 인식했던
그 모든 것을 재정립하려는 욕망의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자아는 유한의 영역에 갇혀 있습니다.
허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의 자유를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 욕망인 상상력으로 인해 세계는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세계 속에서 시인들이 시를 짓는 상상력도
현실의 풍경을 낯설게 하는 해체미학 쪽으로 지향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메마르고 금간 논바닥을 가르쳐 손금이라고 표현 한다던가
끊임없이 변모해 가는 현실세계를 니고데모에 비한다든가 등등 말입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실지 인물로서 약 2000년 전 유대인의 학자이며 정치가였습니다.
손금에 길이 있다는 기복적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를 궁금해 하는 인간의 본능인 듯싶습니다.
당대 최고 지성을 갖춘 그가 학교라고는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는 예수라는 분에게 찾아갈 때 밤을 이용했습니다.
최고의 지성인이 학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찾아갈 때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용기를 내여 찾아갔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체면대문에 밤을 선택한 것은 자신에 대한 예우였습니다.
스스로 창피를 모르는 사람보다는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은 상대성입니다.
부부지간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부끄러움은 남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호기심은 곧 나의 호기심이기도 합니다.
낙서로 몇 마리의 고기를 잡아 찌개꺼리를 만드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박사를 따내어 허공을 휘어잡는 문학인들이 부럽고
쓰자마자 지워지는 악전(樂典), 흥얼거리는 낙서 경전(經典),
사실지원 또 지워져도 더 깊이 흘러가는 독경(獨經),
지구의 모든 문장이다 그와 같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대책이 없습니다.
철학과 시문학의 카이에즘(chiasme-교차배열),
니고데모의 현상학의 증요한 개념은 예수의 형이상학적 가르침, 사람이 사람답게 태어날려면 거듭나야 된다는 가르침과
형이하학적 니고데모의 현상학적인 이 장대한 철학적 프로그램에서
컴퓨터가 혼돈을 일으켜 프로즌 되는 현상에 맞닥뜨려 집니다.
미래의 철학은 이미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의 다른 이름인 형이상학보다도 더 근원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입니다.
들길을 말없이 혼자서 걷고 있는 사람이 시인인지 철학인인지 아무도 모르듯
미래의 사유는 언어를 모아 단순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름이 하늘의 구름인 것처럼
언어는 존재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현실의 사유가 스스로 말하면서 언어 안에 눈에 띄지 않는 이랑을 만듭니다.
이 이랑은 농부가 천천히 걸으면서 만드는 밭이랑보다 더 눈에 띄지 않는 것입니다.
역사는 시인과 철학자 그 어느 편이 언어에 봉사하는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떨어진 산정에 살면서 말없이 서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두 이론의 정상,
암 바위 숫바위의 산꼭대기에서 두 산정을 잇고 있는 저 거대한 땅 바윗덩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말했듯 사람이 어찌 거듭나야 합니까?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 가야합니까 하는
원초적인 여성 생리를 파 해쳐야하는 새삼스러운 소명은 이 자리에 대한 결례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런 시를 쓴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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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아랫도리에 들어가 창조의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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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두 여행자가 사막의 길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의견 다툼으로 한 사람이 뺨을 맞았습니다.
맞은 사람은 자기가 뺨을 맞은 것을 잊기 위하여 모래위에 글을 썼습니다.
한참을 더 가다가 오아스스는 모래의 늪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때 때린 친구는 오아스스를 늪에서 생명을 걸고 구해 주었습니다.
오아스스는 생명의 은인을 잊지 않기 위해 지워지지 않는 돌 위에 글을 새겼습니다.
이 두분 중에 한분이 예수라면 이 예수는 때린 사람일까요 맞은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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