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칭기스칸의 매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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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청소부 오필리아가 내손에 뭔가를 꼬옥 쥐어주고 달아났다. 손으로 만든 하트모양 브로치였다. 빨강, 분홍, 흰색 하트 위에 얹힌 빤작이가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다. 오후에 수술방 테크니션 바니가 지금 당장 잔디밭으로 나오라 전화했다. 문을 열자마자 안개꽃과 빨간 줄장미로 장식된 하트 리쓰를 품에 안겨주었다. 지난 밤 심심해서 만들어보았는데 내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단다. 대책 없이 붉은 하트를 들고 쏟아지는 태양빛 아래 눈을 감고 한동안 서있었다.
벌써 사랑의 계절인가. 뜰 앞의 장미가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겨울 입김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사랑은 농익은 것이 아니라 설익은 존재들의 대명사인지도 몰라.
넌더리나는 인간 사랑을 벗어나 초인간적인 사랑을 명상한다. 아, 생각났다. 칭기즈칸의 매. 일방적인 나의 사랑이 억울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떠올리며 위로받는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의 의도와 심중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눈에 보이는 상황에만 집착하지 말고 분명 자신의 짧은 잣대로는 잴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으리라 헤아려,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교훈의 예화.
칭기즈칸은 어느 더운 여름날, 사냥 중에 심한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골짜기에 이르자 머리 위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아끼는 은잔을 들이대고 몇 모금 고인 물을 마시려는 찰라, 그가 총애하는 매가 잽싸게 날아와 그 잔을 뒤집어 귀한 물을 엎질러버렸다. 그러기를 두 차례. 세 번째 물을 받으면서 그는 이미 칼을 빼들고 있었다. 매는 아예 그 잔을 쳐서 비탈 아래로 떨어뜨려버렸다. 그는 매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언덕 위에 오른 그는 마침내 보았다. 샘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썩어가고 있는 맹독의 거대한 뱀. 그가 그토록 한 모금 마시고자 갈망했던 물은 그 샘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매. 그는 일순 갈등했을까. 주인의 손아귀에서 번쩍이는 칼날을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잔을 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슬펐을 것이다. 공중을 선회하며 모든 것을 보아 상황을 알고 있는 그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리라. 사랑하는 주인을 살려야 하니까. 그는 주인이 지난 세월동안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기억하고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는 주인의 오해를 받으면서도 죽음으로 그의 사랑을 증명했다.
우리는 종종 사고를 당하여 생명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이 낯선 이들로부터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도움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다. 공통점은 그 천사들이 과거 언젠가 낯선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랑의 사슬이다.
목숨을 구한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덤이라는 것을 안다. 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타인을 구할 용기를 낸다. 살아있는 자 누구 하나 죽음의 고비를 한두 번 넘기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꺼져가는 생명을 감싸안아주는 낯선 존재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음은 어느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의 대가인 것이다.
사랑의 계절이다. 사랑해야지. 짐승도 사랑의 빚을 갚을 줄 아는데 인간이 사랑을 외면해서야 말이 되는가. 넌더리나더라도 사랑해야지. 투자하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병원 뜰 앞의 자목련이 화려하다. 사랑하고 그 반응을 얻고 싶다.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반응하고 싶다.
‘문학세계’ 신인상 등단. ‘월간 한국수필’ 해외수필문학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회원. 수필집: 행복은 손해 볼 수 없잖아요. 물빛 사랑이 좋다. 코드 블루. 나는 낯선 곳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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