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시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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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강위덕
평생 처음으로 투박한 만두를 빚으니
그 몰골이 나를 닮았다
온갖 속물 꾹꾹 눌러 제 규격에 가두고
속살 비추는 만두의 피부는
터질 듯 나의 마음을 닮았다
짓눌리고 씹힘이 더할수록
속물의 섬광이 일렁인다
해설
인간의 육체는 말하는 기호라고 합니다.
이 사실은 병리학적으로 프로이드 정신 분석학에 의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모든 육체적 행위와 증상은
내적 욕망과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기호입니다.
육체의 말을 해석하는 방법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불안한 사람은 불안하다고 얼굴이 말하고
파란 신호등에서 운전자가 요구하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때
화자는 손톱을 쥐어뜯습니다.
단순 관찰은 대상을 물리적인 것으로 바라보지만
관찰이 주관적 인식작용을 거친 <간파>가 될 때
그것은 미적 실체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대상에 대한 미적 판단에 이르는 주체적 시각을 확보합니다.
오늘 내가 빚은 만두 속에는 생의 이러 그러한 사연들이
생성문법처럼 명징하게 들어 납니다.
씹을 때마다 생기는 전력은 희미한 섬광에 불과하지만
섬광을 일으키는 영역은 나의 전 생애의 험준함을 다 들어냅니다.
터질 듯 얇은 만두의 껍질이 아슬하기만 합니다.
우두둑 우두둑 아귀의 관절은
죽은 줄 알았던 옛 추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생성의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가끔 스스로를 차분히 정리할 필요를 느낍니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중에 나 스스로와 남들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느 길을 밟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므로서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 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가운데 가장 좋은 반성의 자세는 시를 쓰는 일입니다.
이렇게 시를 씀으로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는 자화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는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장래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입니다.
시는 자신의 엉클고 흩트리러진 감성을 가라앉힘으로서
다시 고요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묘방이기도 합니다.
온갖 속물 꾹꾹 눌러 제 규격에 가두고
속살 비추는 만두의 피부는 / 터질 듯 나의 마음을 닮았다
이러한 시적 표현으로서 내 자신을 시로 표출하는 동안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을 바라보고 객관적 나의 여유를 갖게 됩니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쓰는 자만이 갖는 면허증과도 같습니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음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내면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그린 시에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글 쓰는 이가 가장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입니다.
쉬운 말로 쓸 수 있는 이야기를
굳이 어려운 표현으로 무장하는 것은 현학적임의 가장 뚜렷한 증거입니다.
현학은 사상의 우치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시를 쓸 때 반듯이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시를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저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평에서 난해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아방가르드의 중심에 서서 우치스러운 단계의 현학을 분해시킵니다.
생성(生成)과 행순(行順)의 직선(直線)을 입체적인 교직(交織)의 형태에서
사유와 감성의 운율을 굴신자재(屈伸自在)의 경지로 몰아붙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직된 상태에서 확 누그러트리는 그러한 형태로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현학과 아방가르드의 차이점입니다.
시인이 표출하는 진실의 선도(鮮度)가 역동적으로 시에 표출될 때
이것은 관념사상이 아니라 진실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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